관광
희망과 삶을 노래하는 소래포구
희망과 삶을 노래하는 소래포구
시꺼먼 몸을 드러낸 갯벌, 그 옆으로 닻을 내린 채 기우뚱하니 멈춰선 고기잡이배들, 한가롭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갈매기, 지친 날개를 잠시 접고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는 철새 떼. 작은 포구를 감상하며 이제는 육교가 된 수인선 협궤열차 철길을 건너가면 활기 넘치는 어시장이 있다. 빽빽하게 자리 잡은 어물전에선 싱싱한 생선들이 팔딱거리고 사람들의 흥정소리와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활기 넘치는 모습 그대로, 소래포구
인천과 시흥을 가르며 홈처럼 팬 물골. 나갔던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조업을 떠났던 고깃배가 속속 포구로 들어온다. 배가 들어온 포구는 활력이 넘쳐흐른다. 뱃고동 소리, 엔진소리, 닻 내리는 소리, 어부들의 고함소리에 이어 어물을 받으러 몰려드는 상인들의 떠드는 소리, 뛰는 소리가 뒤엉켜 선착장은 금방 시끌벅적해진다.
노란 직사각형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우와 집게발을 위협적으로 들어 올리는 꽃게, 펄떡거리는 생선들은 단박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챈다. 순간 선착장은 ‘물 좋은 어물’을 먼저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리어카, 리어카! 좀 지나가게 비키세요!” 배에서 내린 물건을 좌판에 진열할 새도 없이 우르르 사람들이 몰린다. “꽃게 킬로에 얼마예요? 이거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그냥 빨리 담아 주세요.” 꽃게와 새우는 값을 흥정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팔려나간다.
“일단 물건이 좋아요. 싱싱하니까 여길 오죠. 오늘도 동네 사람들하고 같이 와서 꽃게 20kg를 샀어요.” 정도순(개봉동, 50) 씨는 오랫동안 소래를 이용한 덕분에 이젠 물때까지 알고 있다고.
인천수협공판장을 가로질러 만나는 150m 길이의 소래포구 선착장. 출어해서 그날로 잡아온 것을 선주들이 직거래로 바로 풀기 때문에 물때가 되면 소래포구는 사람 체증으로 기분 좋은 몸살을 앓는다.
포구에 기대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일제강점기 때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던 소래마을. 6·25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처음으로 삶의 뿌리를 내리려고 했을 때만 해도 이곳은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황량했다. 1960년대 초 5~6척의 돛단배로 시작된 조그만 어촌이 동력선 300여척을 가진 큰 어항으로 성장한 데는 태풍도 없고 해난사고도 거의 없는 타고난 지형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소래에 기대어 산 주민들의 노력이 컸다.
“1970년대 초에는 황토길 비포장도로에 염해지라 물도 안 나오는 곳이었어. 물은 오봉산 끝자락에서 길어다 먹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인 ‘물양장’도 주민들이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나와서 뻘밭을 돌이나 흙으로 메우면서 직접 만든 거야.”
소래어촌계장을 2번 역임했던 전익수(64) 씨는 소래의 예전 모습을 생생히 전해준다. “인천항이 준공된 1974년 이후엔 새우잡이 어선들이 인천항 대신 소래포구를 이용하면서 그야말로 ‘새우파시’가 개설됐지. 80년대에는 어촌 TV 프로그램을 소래에서 많이 찍어갔어. 그러면서 여기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었지.”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관광버스 수십여 대가 소래에 손님들을 가득 쏟아냈다는 그 시절. 2000년 전후엔 평일 1만5천 명, 주말 3만 명 정도가 소래어시장을 찾았다고 한다.
아픈 역사 딛고, 희망이 된 소래철교
매일 조업하는 고된 삶도 소래를 찾는 사람들과 자식 키우는 재미가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으리라. 뱃고동소리와 가격을 흥정하는 목소리 저편으로 소래철교가 보인다. 조업을 떠날 때, 그리고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 배들은 반드시 철교 밑을 통과해야 한다. 어민들은 멀리 철교가 보이면 집에 다다랐다는 안도감, 아내와 자식들의 기대감에 마음이 설렌다고 말한다. “철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겐 집으로 돌아가는 문이고, 희망이지. 자살하려는 사람이 소래철교를 찾았다가 죽기 전에 어시장이나 한번 둘러보자 했던 사람은 절대 죽지 못한다는 말도 있어. 생각해봐. 볕에 그을려서 새까만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치열하게 사는 포구 사람들 보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 안 들겠어?”
소금을 나르기 위한 일제의 수탈로였던 수인선의 흔적이 남아있는 소래철교. 철로가 놓인 사연이 실망스럽다 해도 소래철교는 소래와 월곶을 잇는 해안가 서민들의 소중한 교통수단이었다. 철교엔 폐선된 수인선의 철교 침목과 선로가 비교적 잘 남아있어 과거 협궤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열차가 사라진 뒤에도 당시를 회상하는 많은 이들이 소래를 찾아 술 한잔 기울이며 옛 생각에 잠기는 풍경이 연출되곤 한다. 연인이 함께 손을 잡고 소래철교를 건너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전설도, 다리를 건너면서 소원을 빌 때 포구로 드나드는 배가 있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도 있다고. 저녁 무렵, 철교 위에서 보는 바다는 붉게 물든 낙조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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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는 수도권에서 가장 큰 어시장이지만,
1990년대의 모습과 별반 다름이 없다.
1991년 소래포구(아래) / 2017년 소래포구(위)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소래
“예전이나 지금이나 소래의 풍경은 많이 바뀌지 않았어요. 주변에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긴 했지만, 세월이 흘러도 이렇게 옛날 모습 그대로인 포구는 아마 드물 겁니다.”
1990년대부터 조업을 했다는 고철남 어촌계장은 진흙탕 갯벌 속에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할 만큼 소래포구의 환경이 열악했다고 전한다. 또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엔 어민들이 일출·일몰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해안가 초소에서 총탄이 날아왔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여기가 공유수면을 매립했잖아요. 그래서 그린벨트 지역이라 그동안 정부 예산 지원이 없었습니다.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어민시설이 들어왔지, 그 전에는 이런 포구가 있을까 할 정도로 아주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어민들이 자생적으로 필요한 시설을 조성해 나가기도 했었죠.” 소래가 어민 소득과 조업 부분에서는 활성화됐지만, 기반시설이 낙후돼 타 지역으로 떠난 어민들도 많았다고.
다행히 소래포구는 지난 4월 ‘국가어항’으로 지정됐다. 연간 500만 명이 찾은 관광명소임을 고려해 2025년까지 공원과 친수공간도 개발해 수산과 관광 기능을 겸비한 수도권 대표 어항으로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국가어항은 해양수산부가 직접 지원하니까 기반시설도 현대화되고,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조업을 할 수 있겠죠. 어민들의 기대감이 큽니다.”
소래하면 역시 ‘새우젓’
11월, 한 해 중 소래는 이참이 제일 바쁘다. 김장철이 시작되는 탓이다. 뭐니 뭐니 해도 ‘소래’하면 ‘새우젓’. 살림 솜씨가 노련한 주부들은 새우젓의 재료가 되는 잔 새우나 김장에 버무려 넣는 생새우를 구입하기 위해 소래포구를 찾는다. “그날 잡은 새우를 즉석에서 염장해주니까 많은 분들이 소래를 찾아주시는 것 같아요.” 1980년대부터 소래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이기숙(61) 씨는 오래된 단골손님들이 많다고 귀띔한다.
지금은 냉장시설이 발달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부평토굴에 새우젓을 보관했었고, 1978년부터 2000년대 초까진 근처 광명동굴에 새우젓을 보관하기도 했다고. 광명동굴엔 연간 3천여 드럼의 소래 새우젓을 보관했다는데, 당시 이 정도 물량은 서울과 수도권 사람들이 한두 번쯤은 소래 새우젓으로 김장을 담갔을 엄청난 양이었다고 한다. 생새우는 그날 잡은 걸 그날 팔기 때문에 가격이 유동적이다.
육젓 1kg 4만 원, 오젓 1만 5천 원~2만 원, 추젓 1kg 1만 5천 원, 생새우는 4kg 4~6만 원 선
가격 문의 : 소래어촌계 ☎ 442-6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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