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굿인이 만난 사람 : 이병수 前 인천상륙기념사업회 이사장
세월 위에 세운 기억, 인천의 역사
이병수 前 인천상륙기념사업회 이사장
전쟁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그 시대를 살아낸 한 사람의 증언은 여전히 현재를 비춘다.
이병수 전 인천상륙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이야기는 개인의 역사를 넘어, 인천이라는 도시가 쌓아온 시간과 맞닿아 있다. <굿모닝인천>은 역사적 의미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한 시민이 걸어온 삶과 기억, 그리고 그가 지켜온 ‘자유’의 가치를 기록하고자 이 글을 준비했다.
글. 콘텐츠기획팀 오승환 사진. 박성수 포토디렉터

바닷가 소년, 길고 특별했던 학창 시절
1937년 경기도 시흥군(현 시흥시)의 작은 마을. 간석지와 개간지에 논이 펼쳐지고, 정미소가 돌아가던 그곳에서 이병수 전 이사장은 태어났다. 못살던 시절, 그는 늘 갯벌에서 불어오는 짠 내와 정미소에 쌓인 보릿겨 냄새 속에서 자랐다. 광복의 날, 온 동네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13살 소년의 가슴속에 ‘자유’라는 단어가 깊게 새겨진 날이었다. 소래국민학교(현 소래초등학교) 분교를 7년이나 다녔다. 출석일 수를 채우지 못해 유급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만학도 실향민과 전쟁고아들이 함께 책상에 앉았다. “나이도, 배경도 제각각이었지만 우리는 함께 배우고, 함께 자랐습니다.” 시대의 무게가 어린 소년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성적이 우수해 인천중학교에 진학했다. 기차를 타고 처음 본 개항의 도시 인천은 그의 눈에 거대한 세상처럼 다가왔다. 붐비는 거리, 달리는 철길, 낯선 건물들…. “세상은 이렇게 넓구나”라는 감탄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러나 곧 전쟁이 터졌다. 인천중학교 교정은 UN군에 접수되어 수업을 할 수 없었고, 학생들은 신흥국민학교, 월미여상(현 인천여상) 등으로 옮겨 다니며 겨우 공부를 이어갔다. “교실은 늘 변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인천중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1989년 두산기계 공장을 방문한 두산그룹 박용곤 회장과 이병수 이사장

세월을 이긴 발걸음, 기억을 향한 여정. 아흔의 노신사는 인생의 정상에서 여전히 '오르고' 있다.
피란길과 전쟁의 기억
“형들은 국민방위군으로 전장에 나갔고, 저는 사돈댁을 따라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피난을 못
가셨어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정미소를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을은 간석지 덕에 논농사가 많았고, 북측 첩보부대가 주둔하며 곡식을 군수품으로 수탈하곤 했다. 그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전략적 거점이 되었고, 작전의 일부로 폭격이 가해졌다. 다행히 UN군과 국군은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려 주민들에게 조용히 대피 지시를 내렸고, 대부분은 무사했다. 단 한 명, 모두가 떠난 틈을 타 부잣집을 털러 들어간 도둑만 희생됐다. “역사는 참 묘하지요.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선택은 남고, 그 선택에는 늘 무게가 따릅니다. 마치 권선징악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인간의 품위와 삶의 의미는 남는 법이지요.”
기업인의 길, 책임을 세우다
서울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거쳐 두산그룹에 입사한 그는 곧 ‘아이디어맨’으로 불렸다. 두산기계와 두산농산을 이끌며 위기를 돌파하는 해결사로 이름을 날렸다. “기업 경영은 결국 책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신념이 저를 지탱했습니다.” 그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당시 국내 맥주 시장은 담합 구조였다. 오비맥주와 크라운맥주가 가격을 맞추며 시장을 나누던 시절, 일본에서 맥주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그는 마라톤처럼 이어진 발표와 설득으로 임원진의 마음을 흔들었다. “담합으로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유경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오비맥주는 담합에서 벗어나 경쟁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기업은 살아남았고, 시장에도 활력이 되살아났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주류산업은 한순간에 암울한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소주에 비해 대중성이 떨어졌던 맥주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OB 베어스’라는 맥주 체인점을 기획해 위기를 돌파했고, 이는 곧 OB맥주의 새로운 상징이 됐다. 훗날 프로야구단 ‘OB BEARS’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시련은 언제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다면, 극복 못 할 시련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는 평생 지켜온 경영 철학이 담겨 있었다.
역사를 세우고, 자유를 지키다
은퇴 후 그는 다시 시민의 자리에서 또 다른 소명을 맡았다. 인천상륙기념사업회와 맥아더동상지키기 시민운동본부를 이끌며 20여 년간 사비 수억 원을 기념사업에 쏟아부었다. “동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세대에게는 자유를 되찾은 상징이었죠. 저는 그 기억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후세가 잊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는 이어 덧붙였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누군가는 기억을 세우고, 누군가는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저는 그 일을 제 몫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에게 ‘자유’는 특별한 단어였다.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것도 자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누군가가 지켜주어야 가능하죠.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지키고, 또 지켜줘야 하는 게 자유입니다.” 그의 신념은 단순히 동상을 보존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곧 후세에 자유와 책임의 가치를 남기려는 평생의 소명이었다.
그는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Quantico에 위치한 미 해병대 박물관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곳에는 ‘장진호 전투 기념탑’은 웅장하게 서 있지만, 인천 륙작전을 기념하는 탑은 세워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은 표지석 하나만이 쓸쓸히 놓여 있을 뿐이다. “그 자리를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승전 작전이자, 자유를 지켜낸 역사인데 말입니다. 하루빨리 기념탑을 세워 참전 용사들에게 은혜를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는 여전히 세계와 함께 기억을 세우고자 한다. 인천상륙작전 70주년 기념비 건립에 힘을 보탰듯, 이번에도 역사를 세계인과 나누려 한다.
바다 위에 세운 마천루, 인천의 도약
그의 기억 속 인천 앞바다는 늘 바람과 파도가 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 바다는 육지가 되었고, 육지 위에는 수십 층 마천루가 솟아올랐다. “제가 젊은 시절만 해도 송도는 온통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바다 위에 세계적 빌딩들이 서 있지 않습니까. 그건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구도심에서 산업을 지킨 이들, 바다를 삶터 삼아 살아온 이들, 인천 시민 모두가 함께 세운 기적입니다.” 영종도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채집을 위해 배를 타고 건너던 야생의 섬이 이제는 세계의 하늘 길이 모이는 국제공항과 신도시가 되었다. 구도심의 좁은 골목에서 살아낸 시민들의 끈기와 신도시에서 새로운 길을 연 시민들의 도전이 어우러져 오늘의 인천이 완성됐다.
전쟁의 폐허에서 출발해 세계와 연결되는 도시가 된 인천. 세워온 시간이 모여, 인천 전체가 함께 이룬 도약이었다.
기억을 예술로 남기다
아흔의 노신사는 요즘 매일 붓을 든다. 단순한 취미 수준을 넘어 전시회를 열 만큼 작품성도 수준급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성취가 아니다. “전쟁 때 아버지의 사진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제 꿈은 죽기 전에 아버지 초상화를 완성하는 겁니다. 제 손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세우고 싶습니다.” 그의 화폭에는 전쟁의 잿빛도, 인천의 바다도, 삶의 희망을 상징하는 빛도 담긴다. 그림은 그에게 또 다른 기억의 기록이며, 동시에 후세에게 남기고 싶은 마지막 소명이다.
epilogue
기억을 쌓고, 책임을 쌓고, 도시를 쌓고, 역사를 쌓아온 시간들.
그 위에 오늘의 인천이 세워졌다. 이병수 전 이사장은 ‘인천시민의 날’을 맞아
인천시장표창을 받았다. 한평생 세워온 기억과 자유의 가치가,
이제 인천 시민 전체가 함께 기리는 공적이 되었다. 그의 걸음마다 남은 것은
기억이었고, 역사의 토대였다. 그가 남긴 기억은 이제 우리 모두가
함께 세우고 지켜야 할 인천의 미래로 이어진다.


이병수 이사장의 유화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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