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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인천과 하와이

2019-12-03 2019년 12월호


인천과 하와이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공작의 깃털처럼 사방으로 잎을 뻗친 야자수, 수억만 와트의 태양 광선이 드리워진 에메랄드의 바다. 2011년 가을에 찾은 하와이 호놀룰루는 문명이 닿지 않은 ‘시원(始原)의 세계’처럼 보였다. ‘스타 오브 호놀룰루(STAR OF HONOLULU)’란 브랜드가 선명한 고층 유람선이 눈에 들어왔다. ‘갤릭(Gaelic)’호가 오버랩됐다. 한 세기 전 우리나라 최초 이민자들을 싣고 태평양을 건넜던 배.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 시커먼 표정의 사람들이 ‘겐카이마루(玄海丸)’호에 올랐다. 남녀, 어린이 121명의 얼굴이 먹구름으로 뒤덮인 대한제국의 운명을 닮아 있었다.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이 많이 눈에 띈 것은 존스 목사가 하와이 이민을 설득했던 탓이었다. 일본 고베에 도착해 신체검사를 통과한 102명만이 갤릭호에 몸을 실었다. 84%가 인천 사람이었다. 배가 호놀룰루에 닿은 때는 3주 만인 1903년 1월 13일이었다. 그렇게 하와이 이민자의 삶이 시작됐다. 당시 이민은 굶주림과 쇠락하는 나라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건만 하와이엔 또 다른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축우리 같은 ‘농막’에서 숙식하며 하루 10시간씩 일하는 이민자의 삶은 처참했다. 채찍을 휘두르는 루나(십장)와 살갗을 벗겨낼 듯한 뙤약볕은 중노동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끝이 안 보이는 사탕수수·파인애플 농장 뒤로 출렁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민자들은 생각했다. 저 바다 너머에 내 고향이 있건만…. 온종일 일해서 번 50센트에서 1달러 25센트의 돈은 저축하거나 고국으로 보냈다.
이민자의 상당수는 노총각이었다. 조선 여자를 데려와야 했다. 사진혼인법이 제정되면서 ‘사진신부’란 말이 생겨났다. 이민자들이 보낸 예비 신랑의 사진을 보고, 태평양을 건너온 젊은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따금 문제가 발생했다. 사진에선 분명 청년이었는데 만나 보면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나타나기 일쑤였던 것이다. 1910~1924년 울며불며 결혼한 사진신부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사진신부들은 훗날 한인 사회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리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과 함께 외교권을 상실하며 하와이 이민은 중단된다. 그때까지 32개 농장에서 일하던 4,900여 명의 한인들이 2011년 취재 당시엔 4만5,000여 명으로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와이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이민 1세대의 독립운동과 인천에서의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이다. 우남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 장군은 노선이 달랐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54년 설립된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 교명이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를 결합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하와이 이민과 인천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와이 이민 117주년인 12월 22일엔 월미도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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