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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인천의 아침-동인천의 귀환

2021-09-01 2021년 9월호


동인천의 귀환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2021년 8월 동인천역 앞 광장. 왼쪽 파란 건물이 대한서림이다.

후배가 소개팅을 해준다기에 신포동 ‘00레스토랑’으로 나갔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메뉴판을 열어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학생 신분으로 사 먹기엔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던 것이다.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상대는 애프터 신청을 쌀쌀맞게 거절했다. 기분 전환 겸 인근 옷가게에 들어갔는데 가격에 다시 한번 놀라고 주인의 눈총을 받으며 빠져나왔다. 20대의 어느 날 겪은 동인천 신포동의 기억이다.
1980년대만 해도 신포동엔 고급 음식점과 의류 브랜드가 즐비했다. 신포동은 당시 인천의 명동이었고 신포동을 품은 동인천은 인천에서 가장 붐비는 지역이었다. 번화한 상권과 시장, 거대한 주거지와 공장 등이 형성돼 전철은 물론, 웬만한 시내버스 노선은 다 동인천을 거쳐 갔다.
용동 마루턱을 경계로 신포동과 경동이 어른들의 공간이라면 동인천역과 가까운 인현동은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동인천역엔 학생들이 새 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중고, 인성여중고, 상인천여중, 축현초등학교 등 인현동 반경 300m 안에 학교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형문구점과 체육사, 화방, 학원, 탁구장, 분식집이 덩달아 성업을 이뤘다. 명물당, 만복당, 맛나당과 같은 분식집엔 늘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1층은 문구점과 화방, 2층은 디제이DJ가 있는 분식집으로 운영한 대동학생백화점도 학생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다.
서울에 ‘종로서적’이 있다면 인천엔 ‘대한서림’이 있었다. 동인천역 앞에 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대한서림 건물은 만남의 장소였다. 1953년 문을 연 대한서림은 한때 신흥동에 물류 창고를 둘 정도의 대형서점으로 성장했지만 세월의 파고 속에서 많이 축소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로서적이 문을 닫은 반면 대한서림은 여전히 옛 건물 2~3층에서 ‘영혼의 양식’을 팔고 있다.
대한서림 왼쪽 옛 축현초등학교 옆 전자상가는 세운상가 못지않게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인현동 전자상가는 오디오를 비롯한 첨단 전자제품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유혹했다. 지금은 몇 개의 가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철교를 잇는 거리에선 언제나 달큰한 과일 향기가 넘쳐났다. 이 일대를 ‘채미전거리’라 불렀는데 과일 도매상이 줄지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채미는 참외의 사투리다. 채미전거리는 1930년 공설청과물시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는데 1955년 <인천연감>은 인현동청과시장에 38개 점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채미전거리엔 지금 과일28번천국, 영신상회, 동인천청과, 삼산공판장인천청과 4개만이 명맥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그 사이로 건어물을 파는 용신상회, 고우당골동품, 선농원화랑 등의 상점이 눈에 띈다.
이처럼 화려하고 없는 게 없던 동인천 일대가 쇠락하기 시작한 때는 1985년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부터다. 우리 인천시가 동인천역 주변을 다시 2,30대 청년들이 즐겨 찾는 ‘핫플’로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시는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원도심 중심 시가지로 만들어 나간다는 구상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동인천의 귀환을 기다린다. 역 일대 전체가 ‘들썩들썩’했던 그 시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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