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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인천시립도서관 한 세기

2022-01-06 2022년 1월호


인천시립도서관 한 세기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1970년대 율목동 ‘인천시립도서관’ 언덕길엔 언제나 끝이 보이지 않는 학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도, 열람실 한 자리를 차지하기란 율목동 하늘에 뜬 새벽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인천에서 유일한 공공도 서관이다 보니 인천 지역 학생이란 학생은 전부 이 도서관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따금 자리를 배분해주는 ‘형’들이 도서관 출입을 통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네에서 주먹깨나 쓰는 이 ‘동네 형’들은 도서관 입구를 기도처럼 지키며 자신이 알거나 친한 후배들에게 자리를 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어렵게 얻은 자리에서 낭패를 겪는 일도 있었다. 잠깐 동안 화장실이나 휴게실을 다녀온 사이 책상에 놓아둔 참고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증발한 책들은 며칠 뒤 인근 배다리헌책방에서 발견되기 일쑤였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시립도서관은  중·고생, 재수생, 고시생과 공무원 준비생이었던 이들에게 
아름다운 미래의 꿈이 영그는 희망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인천시립도서관(현 미추홀도서관)의 역사는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11월 1일 중구 송학동 현재의 맥아더 장군 동상 자리엔 청광각淸光閣이란 식당이 있었다. 청광각은 독일 무역회사인 ‘세창양행’ 건물이었으나 이때 인천부(인천시청)가 매입, 장서 900권을 비치하고 인천부립도서관을 개 관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한 세기 전인 1922년 1월 6일의 일이다.
이후 도서관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1941년 신흥동 경성지방 법원 인천지청 건물로 이전하지만 1945년 광복과 함께 임시 휴관에 들어간다. 인천시립도서관이 다시 율목동으로 자리를 옮긴 시기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2월이다. 일본인 별장을 리모델링한 도서관이었다. 격동기 속에서도 그럭저럭 잘 운영되던 도서관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장서 5,000여 권을 분실하는 등 최대 위기를 맞는다. 난리 통에 무기휴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도서관이 다시 문을 연 때는 1951년 10월이다.
11년 뒤인 1962년 인천시립도서관은 율목동에 2층 규모의 신관을 짓는다. 본격적인 율목동 시대의 개막이었다. 지금의 ‘율목도서관’ 건물이 그것이다. 신축 당시 신관 1층엔 예총실, 문화원실, 체육회실 등과 같은 예체능 단체의 사무실이 입주하기도 했다.
1981년까지만 해도 단 한 개의 공공도서관을 갖고 있던 인천은 1982년 부평도서관, 1983년 중앙도서관을 시작으로 하나 둘 늘어나 지금은 62개의 공공도서관이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작은 도서관만도 325개에 이른다. 
인천시립도서관이 율목동 시대를 마감한 때는 2009년 6월 23일이다. 이때 이름을 ‘미추홀도서관’으로 바꾸고 남동구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인천시민들의 평생교육과 지역문화 활성화에 애쓰고 있다. 열람과 도서 대출 위주의 도서관 기능이 전시, 공연, 세미나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확장된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2022년 1월 6일 ‘개 관 100주년’을 맞은 미추홀도서관은 지적유산을 보존하고 사람과 책,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며 지식과 지혜의 빛을 세상에 뿌려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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