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생활

소소한 인천사

2022-01-06 2022년 1월호


작은 포구에서 근대화의 중심으로 ‘제물포’



제물포濟物浦는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곧잘 쓰이곤 한다. 그런데 원래 제물포는 현재의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에 위치한 작은 포구였다. ‘제물’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12세기 중국 기록에서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려 중기 때 송나라 사신단 서긍이 고려의 풍물과 제도를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따르면 ‘제 물사’에 들러 예식을 지냈다는 구절이 나오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제물량’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제물포는 아주 오래전에 우리말을 한자어로 바꿔 쓴 것이라 여겨진다. 포구는 물이 드나드는 곳, 다시 말해 물을 건너는 곳이고 이 의미를 담은 한자어로 교체한 것이다. ‘건너다’는 ‘제濟’로, ‘물’은 같은 발음의 ‘물物’로 변경하고, 여기에 ‘물이 들어오는 곳’이란 의미의 우리말 ‘개’를 한자어 ‘포浦’로 옮겨 덧붙인 것이다. 과거 한적한 나루였던 제물포는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일본인과 중국인, 서양인 등이 모여 사는 조계租界가 생기면서 큰 변화의 물결을 맞이한다. 조선 정부가 이곳에 개항장 일대의 행정, 재판, 치안, 조세, 외교 등을 담당하는 인천감리아문을 두었고 인천의 중심이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제물포는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83. 01. 12
인천항 일본 조계지 정함

인천은 대한민국 근대화의 거점으로 꼽힌다.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외국인들이 속속 밀려들었고, 당시 열강들의 각축장인 동시에 국제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때 생긴 것이 바로 외국인 거류지, 조계지라고 불리는 구역이다. 1883년 일본과 체결한 조선국인천항구조계약서에 의해 처음으로 인천에 일본 조계지가 생기게 되었고 이듬해인 1884년 4월에는 청국 조계지, 10월에는 영국 등 각국의 조계지가 들어서며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구를 중심으로 한 일본식 건축물과 차이나타운은 그때의 역사를 지금도 생생히 전하고 있다.


그때, 1월의 인천은…


1884. 01. 16 일본의 압력에 의해 인천의 조계지 확장을 승인
1890. 01. 28 <인천경성격주상보仁川京城隔週商報> 창간
1938. 01. 19 조선우선주식회사, 인천-천진, 청도 항로 개설 결정
1949. 01. 15 경인 간 급행열차 운행
1950. 01. 08 답동시장 개시
1972. 01. 09 인천 화수항 준공
1999. 01. 29 철도청, 경인전철 복복선 부평-구로 개통

사진 출처: 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_ 개항 당시의 인천항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홍보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4
  • 최종업데이트 2024-01-10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