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세계 자살예방의 날 기획 : 창립 40주년 맞은 인천생명의전화
바람개비를 돌리는 바람처럼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다
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 사진. 김경수 포토디렉터
바람개비는 힘차게 돌 때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바람개비가 항상 역동적인 것은 아니다. 바람이 없는 날의 바람개비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오랫동안 돌지 않은 바람개비는 방전된 정체성의 상징이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실패와 좌절, 갈등, 위기 등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다. 지쳐버린 심신에 무기력만이 일상을 지배하는 사이, 돌지 않는 바람개비에 먼지가 쌓이듯 가슴속에 켜켜이 먼지가 쌓인다.
‘인천생명의전화’는 바람의 역할을 자처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멈춰버린 바람개비를 품은 이들의 가슴에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는 일을 한다. 그 덕에 많은 이들이 절망의 심연에서 다시 걸어 나왔다.
“전화 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인천시 미추홀구 경원대로 873 인성빌딩 3층에 자리 잡은 ‘인천생명의전화’. 이곳에서 봉사자들은 전화벨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항상 귀를 쫑긋 세운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이의 간절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생명사랑 밤길걷기’ 행사장을 꾸밀 바람개비를 들고 있는 봉사자들
자원봉사자가 수화기 너머에 있는 이를 위로하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온
생명 존중의 발걸음
매년 9월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다. 날로 증가하는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정했다. 자살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더없이 각별한 날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자살예방의 날을 앞둔 어느 날, 인천생명의전화 사무국의 문을 열자, 바람개비 만들기에 한창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봉사자들 손에서 한 개 두 개 피어나고 있었다. 바람개비의 용도가 궁금했다.
“생명사랑 밤길걷기 행사장을 꾸밀 바람개비에요. 예쁘죠?” ‘생명사랑 밤길걷기’는 인천생명의전화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을 맞아 매년 펼치는 생명존중캠페인이다. 올해엔 9월 20일 송도국제도시 달빛공원에서 열린다. 눈길을 끄는 것은 매년 걷는 거리가 달라진다는 점. 올해 구간은 7.9㎞다. 7.9는 대한민국 청소년 자살률(10만 명당 7.9명)을 의미한다.
2023년에는 OECD 평균 자살률을 상징하는 11.1㎞ 구간에서 행사가 열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생명존중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다면 효과는? “‘밤길을 걷는다고 자살예방이 되겠냐’는 의문이 들 수 있어요. 그런데 ‘죽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길을 걷던 누군가가 우연히 이 캠페인을 마주한다고 가정해 보죠.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같이 살아보자고 응원하며 한밤중에 길을 걷는데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품는다면, 그리고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돌린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겠어요.”
행사 관계자도 인정했듯이 캠페인의 효과를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일반적 잣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함이 행사에 깃들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올해는 인천생명의전화가 창립 40주년을 맞는 해. ‘생명사랑 밤길걷기’는 시민들의 마음돌보미로서, 인천생명의전화가 지나온 40년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마음이 복잡한 이들과의 소통을 이어주는 전화기
인천생명의전화 자원봉사자들
시민들의 눈물 닦아주는
얼굴 없는 친구
1985년 문을 연 인천생명의전화는 가정사나 개인적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우울감을 느끼거나 괴로운 이들이 언제든 전화해서 상담받을 수 있는 전화상담 기관이다. 국제NGO 단체인 생명의전화가 우리나라에 터를 잡은 것은 서울에 이어 인천이 두 번째다.
인천생명의전화는 10개의 상담실과 강의실 및 부대시설을 갖추고 24시간 무료 전화상담과 대면상담, 긴급출동 등 자살예방 상담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와 함께 시민상담대학, 상담원교육, 강사양성교육 등 전문상담교육을 통해 자원봉사자를 양성하는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생명사랑 밤길걷기를 비롯한 홍보사업, 생명존중 인식개선, 자살예방 교육 등 다양한 지원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인천생명의전화의 왕성한 활동은 수치에서도 엿보인다. 지난해만 해도 4,207명(연 인원)의 자원봉사자가 1만 2,049건의 전화 상담을 실시했다. 설립 후 지난해까지 시민상담대학이 길러낸 자원봉사자는 2,500여 명에 이른다.
전화상담기관으로서 인천 시민들의 정서적 울타리 역할을 하다 보니 인천생명의전화에는 다양한 사연과 미담이 차곡차곡 쌓인다.
인천생명의전화에 도움을 요청한 이들 중에는 “시도 때도 없이 거는 전화에도 항상 귀 기울여줘서 고맙다”라며 직접 20
후원자가 된 경우도 있다. 더 나아가 아예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자살을 예고한 내담자가 이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을 알고 후원자 모금을 통해 틀니를 해준 사연도 전해진다.
인천생명의전화의 가장 큰 특징은 순수 후원금과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단체라는 점이다. 자원봉사자들에게 교통비 몇 천 원이라도 쥐여주는 게 관행이지만, 이곳의 자원봉사자들은 오히려 돈을 내면서 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는 센터 공간을 이재홍 초대 이사장이 기부했을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다.
일주일에 한 번 모든 상담 자원봉사자가 한데 모여 녹음된 상담 내용을 공유하면서 의견을 나누거나 개선점을 찾는 ‘수퍼비전’도 인천생명의전화가 자랑하는 특화 프로그램이다.
40년간 ‘얼굴 없는 친구’로서 힘들고 괴로운 시민들의 눈물을 닦아 준 인천생명의전화. 멈춰버린 바람개비에 다시 바람을 불어넣듯 앞으로도 보다 힘찬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길 기대해 본다.
Info. 인천생명의전화
032-438-9191 1588-9191
Mini Interview
“자살, 가치관을 바꿔야
줄일 수 있습니다”
박미희 인천생명의전화 소장
대한민국은 20년 넘게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자살이 ‘사회적 재난’으로 인식될 지경이다.
10년 넘게 수없이 많은 이들의 고충과 괴로움에 귀를
기울인 상담전문가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볼까.
인천생명의전화 박미희 소장은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부터 바꿔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Q.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옛날보다 삶이 더 풍요로워졌 는데 자살률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옛날 못 살던 시절에는 10명 중 9명이 못난 사람이고 1명이 잘난 사람이었어요. 그 잘난 한 명은 그냥 대우받으면 되는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8~9명이 잘 났는데 1~2명이 못난 사람으로 사회 구조가 바뀌었어요. 못난 한두 명은 살고 싶지 않은 것이죠. 돈이나 경제력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문화에다 경쟁은 얼마나 치열한가요. 이런 게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봐요.
Q. 경쟁을 언급하셨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가치관을 심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자녀를 칭찬할 때는 조심해야 해요. 경쟁심을 유발하는 칭찬 대신 자존감을 높여주는 칭찬을 할 것을 권합니다. 가령 ‘네가 1등을 해서 너무 좋아’라는 칭찬을 자주 받는 아이는 평생을 늘 경쟁심리에 시달릴 수밖에 없어요. 2등으로 떨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대신 등수를 칭찬하지 말고 노력을 칭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등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니, 그 노력 정말 대단하다’라
는 식으로요. 외모에 대한 평가도 비슷한 관점으로 바라보아 야 할 것입니다.
Q. 결국, 과도한 경쟁 문화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타고난 명命까지 살아내다.’ 그게 ‘생명生命’이라는 한자에 깃 든 의미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정해져 있는 ‘명’이라는 게 있는데 그 명보다 돈을,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더 중시하는 문화나 가치관이 문제인 거죠. 이런 가치관을 바꾸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가정 문제로 인한 상담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조언을 해주신다면.
가정에서의 갈등은 결국 자신의 가치관대로 다른 가족을 이끌려고 할 때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의 틀이 나를 화나게 하는 건데 대부분 남편 또는 자녀가 나를 화나게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요. 자녀들이 싸울 때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라는 가치관 대신 ‘아이들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부모는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식이에요. 결국 가치관의 문제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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