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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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시장-이홍복
도쿄아시안게임 사이클 금메달리스트 2관왕 이홍복자전거 한 대로 후지산을 무너뜨린 인천 사나이시민 시장 이홍복광복 전에 엄복동이 존재했다면, 광복 후엔 이홍복이 있었다. 엄복동이 조국을 잃은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었다면, 이홍복은 6·25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둘 다 자전거 하나로 말이다.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후지산이 무너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대한의 건아 이홍복 선수가 마침내 후지산을 무너뜨렸습니다!”1958년 일본 도쿄東京 사이클 경기장. 임택근 아나운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긴급히 국내로 타전됐다. 인천 출신 사이클 선수 이홍복이 ‘제3회 아시안게임’에서 개인·단체 종목 두 개의 금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2, 3위가 모두 한국 선수란 사실은 일본에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관중석에선 태극기는 물론이고 북한의 인공기가 동시에 물결쳤다. 사상 최초의 남북 공동 응원이었다. “난 지면 잠을 못 자는 성격예요. 게다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경무대(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일본 사람에겐 절대 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 왜정 때 망명해 독립운동하시면서 일본이라면 이를 갈던 분이라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광복 전에 엄복동이 존재했다면, 광복 후엔 이홍복이 있었다. 엄복동이 조국을 잃은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었다면, 이홍복은 6·25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둘 다 자전거 하나로 말이다.“내 손으로 쇠를 구부리고 용접해서 만든 자전거로 논에 흙 깔고 운동했는데 금메달을 두 개나 땄으니 난리가 났지.” 일본 열도를 공황 상태에 빠뜨린 뒤 금의환향한 청년
2020-07-31 2020년 8월호 -
시민이 소개하는 우리 동네 -승천포
개경과 연결되는 임금님의 나루터글 윤용완(강화도 강화읍)강화도 승천포는 지금 철조망으로 꽁꽁 묶여 뱃길이 막히고 형체마저 알 수 없지만, 그 옛날 사람과 배들이 구름처럼 오갔으며, 1232년 고려가 몽골에 장기간 항전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고려 고종이 건너온 나루터였다. 고종은 개경의 경천사로 가는 남쪽 길로 북한에 있는 승천포에서 바다를 건너 강화도 승천포에 내렸다고 한다. 개경은 고려 시대 개성의 옛 이름이다.당시 개경에서 강화로 건너는 승천포진이 강화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마찬가지로 승천포진이 강화에서 개경대로로 통하는 지름길로 이 포구는 북한의 개경 쪽과 강화 쪽이 다 같이 승천포로 불리고 있다. 고종도 개경에서 승천포를 출발해 강화도의 승천포 나루터에 내려 강화도 송악산 아래 궁으로 입궁했다. 귀에 익숙한 이 산은 현재 북한의 개성에 있다. 그런데 강화에도 송악산이 있으니, 이는 고려가 천도하면서 강화의 북산을 송악산으로 고쳐 지었기 때문이다. 승천포도 송악산도 모두 임금이 개경에서 갖고 온 지명들이다. 또 하나, 매년 봄철이면 진달래 축제로 유명한 강화 고려산이 있다. 원래 이름은 오련산이었는데 고려가 천도하면서 그 이름을 따 고려산으로 바꾼, 나라 이름을 가진 국산國山이자 진산이다. 승천포는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개성과 강화를 잇는 뱃길의 관문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황해·평안도에서 한양(서울)으로 가는 배들은 모두 승천포를 거쳤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도 고종은 승천포에서 하선해 화려한 어가의 행렬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어가의 행렬이 어디로 어떻게 궁궐까지 이어졌는지 기록을 찾아볼 수
2020-07-31 2020년 8월호 -
내가 사랑하는 인천-인천문인협회장 김사연
11대째 태를 묻어온 인천글 김사연내 고향은 11대를 살아온 남동구 만수동 369번지, 샛골 부락이다. 내 어릴 적 만수동은 그야말로 시골이었다. 지금의 만수주공 임대아파트 자리는 논농사를 짓던 문전옥답이었고, 만수고등학교 자리는 참외밭이었다. 할아버지는 네 바퀴 마차에 실어 온 참외를 마당에서 선별한 후 참외전거리로 싣고 가 파셨다. ‘만수초등학교’는 내 부친께서도 졸업하신, 역사 깊은 학교다. 만수초등학교의 봄 소풍은 돌말산 약사사가 단골이었고 간혹 배꼽산(문학산)으로도 갔다. 우연인지 그날은 꼭 비가 내렸지만 돌말산에 올라가 경인선 기차를 구경하는 것이 신났다. 송도중학교 시절엔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고, 송도고등학교는 통학을 했다. 당시 교통편은 열악해 안양과 수원에서 오는 소신여객 버스와 소래에서 오는 버스를 놓치면 1~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후에 생긴 운연동행 16번 시내버스도 결행되면 건설훈련원 자리에서 간석오거리까지 걸어가 백마장에서 오는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막차를 놓치면 간석오거리에서 만수동까지 터벅터벅 밤길을 걸었다. 당시 만수당약국과 로얄호텔 자리는 푸른 보리 이삭이 달빛 아래 춤추듯 너울거렸다. 만수동에 들어서면 봉분 앞면에 빨간 벽돌문을 만든 중국인 공동묘지에서 서늘한 바람이 내려왔다.박 씨 집성촌인 박촌말 입구(하이웨이 주유소 건너편)엔 비류고개로 불리는 작은 동산이 있다. 건설기술교육훈련원 인천분원 자리는 사춘기 시절, 황혼에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시심詩心을 키우던 뒷동산이었다. 지금은 눈을 씻어도 볼 수 없지만, 공해에 찌들지 않았던 1960년대 중반만 해도 해질녘 서쪽 하늘엔 웅장한 궁전을 비롯
2020-07-31 2020년 8월호 -
仁生 사진관-여름 졸업식
여름 졸업식사연 박소정(미추홀구 한나루로)가을도 겨울도 아닌 여름 졸업식이라니. 지난해 12월, 마지막 학기를 끝으로 학교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마침표가 될 졸업을 코앞에 둔 2월 즈음, 갑작스러운 코로나19 확산으로 졸업식이 취소됐습니다. 꿈의 높이만큼 학사모를 던져보리라던 기대도, 가족의 축하와 응원도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7월, 모교에서 자그마한 이벤트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열리지 못한 졸업식을 대신해 무료로 졸업 가운을 대여하고, 사진 촬영과 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사였습니다. 열흘간 무려 300여 명의 동기들이 함께하며 의미 있는 추억을 새겼습니다. 졸업 가운 착용 전 발열 검사를 하는 등 안전 수칙도 꼼꼼히 지켰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학사모를 하늘 높이 던지며 생각했습니다. ‘이제 정말 새로운 시작이구나.’ 세상 모든 청년 여러분, 꿈을 잃지 말고, 우리, 다시, 날아봅시다!‘仁生 사진관’은 일상 속에서 겪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인천을 무대로 살아가고 있는 시민 여러분의 사진과 사연을 보내주세요.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보내주신 사진을 실어드리거나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어드립니다.보내실 곳 : goodmorningic@naver.com 문의 : 시 소통기획담당관실 032-440-8305
2020-07-30 202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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