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인천 사람-이설야 시인
아플수록 빛나는
시인의 보석 상자
이설야 시인
시인에게 인천은 한번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적이 없었다. 도시의 풍경은 아프도록 남루했고, 삶은 고통스럽게 슬펐다. 떠나고 싶었지만 번번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던 도시에서, 시인은 여린 마음을 할퀴는 거친 모래 같은 아픔을 곱씹어 진주를 닮은 시를 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이설야 시인의 어린 시절은 궁핍했다. 동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던 그 시절의 기억은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월셋집이 모여 있는 화평동 뒷골목은 장마가 지면 집안까지 온통 물이 들어차 ‘똥바다’와 이어질 듯했다. 건너편 수문통시장은 가난한 아이들의 거친 놀이터였다. 뽑기와 뻥튀기의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 너머로 보이는, 개 잡는 집에는 막 잡은 개 사체가 매달려 있곤 했다.
가난은 시인의 꿈을 가로막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해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 상업계 고등학교 원서를 내밀었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던 여고생 시절, 시인의 주위는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했다. 마작을 하는 주인집 할머니네 담장 옆 쓰레기통에 죽어 있던 길고양이의 눈빛이 그랬고, 신흥동 여인숙에서 까맣게 탄 장판에 누워 한숨 쉬던 다섯 살 소녀의 눈빛이 그랬다.
하지만 스스로 결핍을 지우고 꿈을 가로막던 장벽을 걷어내며, 시인은 기어이 꿈을 이뤄냈다. 다만 인천을 벗어나겠다는 바람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인천에서 돈을 벌고, 인천에서 공부하고, 인천에서 등단했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곳은 난생처음 인천을 떠나 머물던 중국이었지만, 그의 시는 인천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루하고 오래된 도시의 고달픈 삶은, 그의 가슴에 쌓이고 쌓여 그대로 시가 되었다.
시인 이설야는 이제 더 이상 인천을 떠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안에서는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빛나는 시가 되어, 뒷골목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가만히 스며든다.
interview
1.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결국 문학을 전공하고 시인이 됐습니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겠지요?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조도 하고 무역도 하는 작은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일하려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고, 언제 이곳을 그만둘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지요. 그래도 일은 참 열심히 했어요. 사실 회사에서도 잘해주고 그럭저럭 재미도 있었고요. 하지만 일은 어디까지나 생계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문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기대만큼 만족스럽지 않더라고요. 이번에야말로 인천을 벗어나야겠다 싶어 서울에 있는 대학원을 알아보다가 인하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로 가게 됐습니다.
2. 서울행을 포기하고 인천에 있는 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여러 조건을 봤을 때 가장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때 인하대학교 국문과가 교수진과 교과 과정이 굉장히 좋았어요. ‘아, 난 서울 갈 사람은 아닌가 보다’ 했지요. 그런데 대학원 공부도 제 마음에 차진 않는 거예요. 그때 저는 ‘내 시를 쓰기 전에 세상 모든 시를 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세상에 없는 나만의 시를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우연이라도 남의 시와 비슷한 건 절대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학원 공부는 한 분야에 집중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시가 계속 나에게 오려고 하는데도 계속 억누르며 지내야 했어요.
3. 그러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나요?
난생처음 인천을 벗어났을 때, 시가 쏟아져 나왔어요. 계속 서울과 문예창작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지도 교수님 권유로 인하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시를 써야 할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으니 힘이 들었지요.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인천만큼이나 아버지에게서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돌아가셨을 때 상처가 너무 컸어요. 여기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멀리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중국에서 2년 정도 있으면서 습작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돌아와서도 계속 쓰고요. 시를 쓰다 보니, 헛일만 같던 대학원 공부가 괜한 시간 낭비가 아니었더라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안에서 시를 끄집어낼 힘을 키운 거지요.
드디어 2011년에 ‘백마라사’로 등단하고, 2016년에 첫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를 냈습니다. 등단 이후에는 어떻게 지냈나요. 인천작가회의에서 발간하는 계간 문예지 <작가들>로 바쁘게 보냈습니다. 한 권의 책을 기획해서 채워가는 것도 재미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또 평소 시에만 관심을 두었는데, <작가들> 덕에 다른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너무 많이 뺏겨서, 6년쯤 하니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지난해 가을호를 끝으로 정리했습니다. 지금은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어요. 이제 제가 하고 싶은 작업에 몰입해 보려고요. 얼마 전엔 작업실도 구했습니다.
시인 이설야는 이제 더 이상 인천을 떠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안에서는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빛나는 시가 되어,
뒷골목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가만히 스며든다.
2014년에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스 작가로 1년 정도 있었고, 그동안은 집과 도서관, 카페가 제 작업실이었어요. 새 작업실은 배다리 ‘나비날다 책방’ 청산별곡 님이 만든 창작실험실 ‘수봉 정류장’이에요. 한번 와보라는 얘기를 듣고 갔다가 몇 시간 있어보고 바로 결정했지요. 창작자들이 모여 공간을 같이 쓰면서 여러 시도를 하는 곳이에요. 그냥 작업실이 아니라 ‘창작실험실’이라는 게 끌리더라고요.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5. 새로운 시도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지난해 인천아트플랫폼 10주년 전시회 때 선보인 판화 작품을 보면서 다른 예술 장르에도 열려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스 덕에 다양한 작가를 만났고, 실험적인 시도도 몇 번 했습니다. 그중에 춤과 결합한 기획은 반응이 아주 좋았고요. 미술은 워낙 좋아했는데, 판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중국에서 전각을 배우면서부터예요. 문자 언어에만 갇혀 있고 싶지 않아 이미지하고 결합하는 시도를 해봤는데, 지금은 좀 회의적이에요. 이미지랑 같이 있으면 언어가 포섭되는 느낌이랄까요. 지금은 내 장르에 충실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6. 작가 이설야의 작품에 인천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천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애증愛憎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인천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던 어린 시절에는 ‘미움憎’이 컸다면, 지금은 ‘사랑愛’이 더 커요. 작품을 쓰면서, 외면하고만 싶던 인천의 기억에 애착이 생겼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아프고 슬픈 이미지에서 태어난 시일수록 더욱 애정이 갑니다. 여인숙에서 알게 된 다섯 살 소녀의 눈빛을 이야기한 ‘등화관제’, 죽은 고양이를 보고 쓴 ‘네 얼굴에 고양이 발자국 여럿’이 그런 작품들이에요. 제 안에 이런 결핍이 없었다면 예술도 없었을지 모르지요.
시인 이설야의 이야기는 인천시 발행 단행본 <인천, 사람>에도 담겨 있습니다.
책을 받고 싶은 분은 인천광역시 소통기획담당관실 홍보콘텐츠팀(인천광역시 남동구 정각로 29 인천시청 본관 2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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