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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그간 잘 지내셨나요?② 김봉길 전 인천Utd 감독

2021-03-02 2021년 3월호


‘봉길 매직’으로 중국 대륙 축구를 깨우다
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지난해 중국 프로축구팀 감독을 하다 잠깐 고향을 찾은 김봉길 전 인천 Utd 감독이 지난 2월 14일 인천시청 앞 광장 ‘인천愛뜰’에서 활짝 웃고 있다.

봉길 매직, 축구인 김봉길(55)이 지휘봉을 잡으면 어김없이 이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마치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그가 이끄는 팀마다 예상을 뒤엎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승승장구한다.
지난해 사령탑을 맡은 중국 ‘산시성(山西省) 시안(西安) 창안 FC’도 그랬다. 중국 2부 리그 최하위로 “잔류만 해도 성공”이라던 팀이었다. 김봉길은 그러나 휘리릭, 봉길 매직으로 이 팀을 중위권으로 올려놓았다.
부평 출신으로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축구 역사를 새로 쓴 김봉길을 신축년 설 연휴 마지막 날 ‘인천愛뜰’에서 만났다. 그는 소띠 해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중국에서 잠시 귀국, 계양구 자택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코로나 검사와 자가격리 2주 하고 나니 시간이 금세 지나가네요. 현재 중국의 1·2부 리그 구단주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아 진로를 고민하고 있어요. 팀이 확정되는 대로 중국으로 갈 겁니다.” 김봉길은 “얼마 전 산시팀과 1년 계약을 끝내고 중국에서의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라며 “1년 만에 고향에 오니 모든 것이 정겹기만 하고 참 좋다”고 말했다


부평 고향, 달리기 잘해 부평동초 3년 때 스카우트, 부평동중·부평고 축구부 창단 주역


고향, 나고 자란 곳. 김봉길의 고향은 부평4동이다. 현재 부평대로 우체국 뒤쪽 골목에서 태어나 쭈욱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김봉길은 여간 개구쟁이가 아니었다. 서너 살 때부터 돌멩이 던지기와 같은 과격한 놀이를 하는가 하면, 틈만 나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골목을 뛰어다녔다. “엄마 아버지는 돈 벌러 부평시장으로 나가시고 열다섯 살 차이 나는 큰형을 비롯해 형들이 모두 학교에 가면 외톨이로 남겨진 기분이었어요. 그게 싫어 밖으로 나가 뜀박질을 하곤 했지요.” 부모님의 생계 터전은 부평시장이었다. 아버지는 리어카에서 솜사탕과 가루 주스를, 어머니는 좌판을 깔고 채소 등을 팔았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4형제를 키워냈다.
푸성귀와 생선 냄새가 진동했지만 시장 골목의 바람을 가르는 느낌은 언제나 좋았다. 스피드를 좋아했던 김봉길에게 초등학교 3학년 때 함께 달려주는 동반자가 생겼으니, 축구공이었다.
부평동초 축구부는 4학년이 되어야 가입할 수 있었지만 봉길은 3학년 때 합류한다. 키는 크지 않아도 발이 빠른 봉길을 유심히 지켜보던 축구부 감독이 그를 축구부원으로 스카우트한 것이다. “학교에 육상부가 없었는데 육상대회가 열리면 학교 대표선수로 나갔거든요. 운동회가 열리면 1등에게 주는 공책과 연필은 늘 제 차지였어요.”
축구부원이 된 뒤, 수업 전후 새벽 운동과 오후 운동을 하며 선수로서의 기본기를 다진 봉길은 1년여 만에 대표선수 유니폼을 입는다. 대회 출전은 체격이 좋은 6학년 선수들의 차지였지만, 봉길은 이미 4학년 때 엔트리에 포함될 만큼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는다.
봉길이 유니폼을 입은 뒤 부평동초는 시도대항 축구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전국적 축구 명문으로 쑥쑥 성장한다. 축구와 함께 부쩍 자란 봉길이 뜻밖의 제안을 받은 건 중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인천·경기권역 중학교 축구 명문은 안양중학교로, 실력 있는 학생들은 안양중으로 진학하는 게 정규 코스였다. 봉길 또한 고향을 떠날 생각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차였다. “제가 6학년 때 부평동초 축구부가 유명해졌거든요. 그러다 보니 시교육청에서 부평동중에 축구부를 창단할 테니 다른 지역으로 가지 말고 15명 모두 진학하라고 한 겁니다.”
좋은 선수들을 안양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천시교육청의 프로젝트였다. 그 선택은 옳았다. 봉길이 3학년이 되던 1981년 부평동중은 춘계·추계·청룡기 등 빅3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봉길에게 ‘전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중학생 선수’란 찬사가 쏟아졌다. 선수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시기가 다가왔다. 재력도 배경도 없이 ‘인천 짠물’ 근성으로 승승장구하던 봉길에게 중학교 진학 때와 똑같은 제안이 들어온다. “김봉길이 진학을 약속한다면 부평고에 축구부를 창단하겠다”는 인천시의 방침이 나온 것이다.
“당시 인천체고와 운봉공고에 축구부가 있긴 했는데 영등포공고, 한양공고, 중동고 같은 축구 명문교는 다 서울에 있었어요. 저는 영등포공고로 갈 생각이었지요.” 김봉길은 “당시 초등학교 때 같이 올라온 동기 15명이 그대로 함께 운동하고 있었는데 내가 서울로 빠지면 동기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봉길은 결국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한 동기들과 고향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축구부원 15명이 부평고 축구부 창단 멤버로 진학하면서 부평고는 축구 명문고의 역사를 열어젖힌다. 부평동중과 부평고 축구부를 창단한 주인공이 봉길이었던 셈이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경험하며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꿈꾸는 김봉길은 중국에서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지난 2월 26일 출국했다.


중국 2부 리그 최하위 산시팀 중위권으로 올려, 월드컵 대표팀 감독 최종 목표


고등학교에 진학한 1982년 봉길은 강주식(골기퍼), 임종훈(수비)과 함께 17세 국가대표팀 센터포워드로 선발됐고 고3 때는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이런 와중에 신흥 부평고 축구부가 두 차례나 전국을 제패하면서 고교 축구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부평고는 이후 노정윤, 이임생, 김남일, 이천수, 최태욱, 이근호 등 굵직한 축구선수들을 배출하는 축구 명문고의 자리를 확고히 굳힌다.
낭중지추. 연세대 85학번으로 진학한 이후에도 김봉길은 1988년 건국대 황선홍 선수와 함께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하는 등 단연 두각을 드러낸다. 1983년 프로축구가 시작된 상황에서 대학생 신분으로 대표팀 선수가 되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월드컵 예선전을 잘 치러냈지만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 가지 못하고 인천 연고 프로축구팀 유공에 들어간 건 부상 때문이다. 줄곧 프로선수로 뛰던 김봉길은 1999년 모교 부평고의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다. 이후 백암종고 감독을 거쳐 고향 인천 유나이티드 수석 코치와 감독을 역임한 김봉길은 2017년 U-23 축구국가팀, 2018년 경기대학교 감독 등 다양한 세대의 축구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명감독의 커리어를 쌓는다. 그런 그를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던 중국의 한 구단이 스카우트 제안을 해온 때는 지난 2019년이다. 중국 2부 리그 18개 팀 가운데 최하위로 강등 위기에 놓인 산시 창안팀이었다. “잔류만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감독으로 선임된 김봉길은 예의 그 봉길 매직으로 중국 대륙을 평정한다.
“코로나 때문에 무관중 경기를 하느라 쉽지 않았어요. 중국은 특히 우리나라에 비해 코로나 방역이 훨씬 엄격하거든요. 4인 이상 모이면 (공안이) 잡아가고 건물에 들어갈 땐 상당히 까다롭게 검사를 진행합니다. 상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어요.”
지난해 산시팀을 9위로 올려놓으면서 ‘봉길 매직’이란 찬사를 소환한 그는 지난 2월 26일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강한 압박과 스피디한 공격 전개. 경기력과 성적을 인정받은 김봉길을 ‘모셔오기’ 위한 전쟁이 중국 현지 1·2부 리그 구단주들 간에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분간 중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갈 생각이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장차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아 월드컵 4강국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다. “중국행은 제 축구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이자 좋은 지도자로 가는 과정입니다. 저는 인천 짠물이고 고추장 근성을 가진 한국인입니다. 어디에 있건 인천 사람은 다르다, 한국인은 대단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뛰겠습니다.”


1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감독으로 선임된 김봉길은 예의 그 봉길 매직으로 중국 대륙을 평정한다.

인천과 전남 경기에서 김봉길 감독
출처 : 인천유나이티드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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