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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시민 시장-이홍복

2020-07-31 2020년 8월호

도쿄아시안게임 사이클 금메달리스트 2관왕 이홍복


자전거 한 대로 후지산을 무너뜨린 인천 사나이

시민 시장 이홍복

광복 전에 엄복동이 존재했다면, 광복 후엔 이홍복이 있었다. 엄복동이 조국을 잃은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었다면, 이홍복은 6·25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둘 다 자전거 하나로 말이다.

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후지산이 무너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대한의 건아 이홍복 선수가 마침내 후지산을 무너뜨렸습니다!”
1958년 일본 도쿄東京 사이클 경기장. 임택근 아나운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긴급히 국내로 타전됐다. 인천 출신 사이클 선수 이홍복이 ‘제3회 아시안게임’에서 개인·단체 종목 두 개의 금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2, 3위가 모두 한국 선수란 사실은 일본에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관중석에선 태극기는 물론이고 북한의 인공기가 동시에 물결쳤다. 사상 최초의 남북 공동 응원이었다. “난 지면 잠을 못 자는 성격예요. 게다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경무대(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일본 사람에겐 절대 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 왜정 때 망명해 독립운동하시면서 일본이라면 이를 갈던 분이라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
광복 전에 엄복동이 존재했다면, 광복 후엔 이홍복이 있었다. 엄복동이 조국을 잃은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었다면, 이홍복은 6·25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둘 다 자전거 하나로 말이다.
“내 손으로 쇠를 구부리고 용접해서 만든 자전거로 논에 흙 깔고 운동했는데 금메달을 두 개나 땄으니 난리가 났지.” 일본 열도를 공황 상태에 빠뜨린 뒤 금의환향한 청년 이홍복은 귀국 후 경무대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금메달 한 개를 대통령에게 선물한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애로 사항이 뭐냐고 묻길래 사이클 전용 운동장을 지어달라고 했어요. 보리에 강냉이 섞은 밥과 개떡 먹으며 운동하는 건 견딜 만했지만, 자전거 탈 운동장은 꼭 있어야 했거든.” 대통령 지시에 따라 서울 마장동에 부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런데 추후 예산 문제로 유야무야되면서 그의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고.
중구 유동에서 태어난 이홍복(87) 옹이 자전거를 처음 타기 시작한 때는 광복 이후인 영화초등학교 6학년 때다. 이후 자전거로 전국을 휩쓸던 그는 6·25전쟁을 겪고, 1953년 정전과 함께 육군첩보부대(HID) 사이클 선수로 스카우트된다. “말하자면 군 소속 운동선수가 된 셈이지. 내가 아는 선수들을 데려와 아예 사이클팀을 창단했어요. 그렇게 5년 뒤 세계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거야.”
세계 사이클계에 굵은 족적을 남긴 그는 서른세 살 때 은퇴를 한다. 제대와 동시에 영종도 조선소에 취직한 그는 후에 독일 회사에 취업, 한국을 떠나기도 했다. 기업도 못 만들던 사이클을 ‘수제’로 만들어 탈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흥초등학교 건너편 중구 제물량로 133에 지금의 자전거포를 차린 때는 독일서 귀국한 1975년이다. 이홍복이 자전거포를 차렸다는 뉴스를 접한 전국의 자전거 마니아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우리나라 자전거 동호회란 개념도 그의 자전거포에서 태동한 것이다. 구순을 앞둔 이 옹은 여전히 자전거와 한 몸으로 살고 있다. 간판도 달지 않은 채, 손님이 찾아올 때만 문을 열어주는 그의 모습에서 ‘노장의 권위’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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