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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인터뷰-국민 아버지 최불암

2020-10-05 2020년 10월호

국민 아버지 최불암

영원히 그리울 ‘바다 내 고향’ 인천

그리울 때도, 행복한 순간에도 내 고향 인천의 바닷가를 많이 찾아왔어요. 최불암을 키운 건 인천의 바닷가예요.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여기가 바로 제가 졸업한 학굡니다. 허허, 내 자리가 아마 이쯤 됐지? 어휴 이게 몇 년 만인가, 허허허. 그래도 그땐 이 작은 책상에서 참 꿈도 많았는데….’
배우 최불암(80, 본명 최영한)은 1994년 한 제과 회사의 CF에 등장한다. 인천신흥초등학교 교정을 지나 교실에 들어간 최불암은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앉았던 자리를 찾아 책상을 어루만지며 그 특유의 구수한 목소리로 독백을 한다. 그는 여기서 받은 개런티를 모교에 전액 기부, 낡은 책걸상을 새것으로 바꿔준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학교 시설이 변변치 않았지. 수십 년 만에 찾아갔는데 옛날 책상 그대로인 것 같더라고. 후배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부했어요, 파~하.”
인천 금곡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최불암은 지금도 고향을 자주 찾는다. 촬영을 위해, 고향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인천에 온다. 지난 7월 ‘인천愛뜰’ 잔디를 밟은 건 어려운 환경을 딛고 열심히 사는 어린이들을 응원하는 ‘인천 아이리더 제1기 성과보호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아동 옹호 기관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국 후원회장 일을 오랫동안 해온 그로서는 당연한 발걸음이기도 했다. 그는 이날 인천시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인천 발전을 위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940년 그가 외아들로 태어났을 때 부친 최철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광복 이후 인천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인천건설영화사와 신문사를 차린다. 그러나 3년 만인 1948년 부친은 직접 제작한 영화 개봉을 앞두고 과로사한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서 쭉 나를 키우셨지. 중구 신포동 동방극장 지하에서 등대뮤직홀이라는, 지금의 음악 카페 같은 것을 하셨어요.”
어린 영한이 배우의 꿈을 싹틔우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어머니가 극장 지하에서 장사를 하시다 보니 자주 영화를 보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게 즐거웠다. 키 크고 멀쑥한 외모에 줄곧 부반장을 도맡았던 영한은 반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영화 얘기를 할때면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더라고, 파~하.”
초등학교 4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어머니와 피란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돌아와 서울로 이사를 한다. “아들하고 먹고살려고 이사한 거지. 어머니가 명동에서 ‘은성’이란 대폿집을 운영하며 저를 키우셨어요. 시인, 문인들이 많이 발걸음하던 곳이었지.”
서울에 살면서도 최불암은 자주 고향의 바닷바람을 맞는다. “아내와 연애할 때 만석부두, 작약도 같은 인천 바닷가에 많이 왔어요. 멋진 내 고향의 바다 덕분에 결혼할 수 있었지, 허허.”
18년간 출연한 ‘수사반장’, 22년간 이끌어온 ‘전원일기’에 이어 그는 요즘 ‘한국인의 밥상’에 10년째 출연 중이다. 최불암은 오는 11월 ‘한국인의 밥상’에서 인천 도서지역의 전통음식을 소개한다. 뭘 하나 시작하면 꾸준히, 오래도록 끌고 가는 국민 아버지 최불암의 미소에서 황해처럼 넉넉한 인천 사람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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