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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인천의 아침 - 인천항

2022-07-06 2022년 7월호


제물포 르네상스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월미도에서 바라본 인천 내항


20대 후반, 인천항에서 떠오른 태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눈부신 광채와 따뜻한 온기. 황해의 아침 햇살은 차이나타운과 인천 내항 사이를 걸어 첫 출근하는 청년의 앞길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와 부두에 정박한 배가 항구도시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인천항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습니다.” 사무실 창을 통해 지는 주황빛 노을을 바라보며 내뱉은 새내기 사원의 말에 신문사 선배가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인천항이라고 부르지만 본래 이 자리는 제물포였지.” 제물포濟物浦 지역이 전철역명이 있는 미추홀구 도화동 일대가 아닌 인천 내항 일대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게 그때였다.
기록을 보면 제물포란 지명은 조선 초기 이 자리에 있었던 수군 기지 제물량濟物梁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온다. 제물濟物은 ‘물을 건너다’, ‘물가의 나루터’란 뜻이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 가깝던 제물량엔 해안 경비를 위한 군사 진지가 설치돼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인천군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고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가 있어 지킨다’란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제물량영은 인천부 서쪽 19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수군 만호 1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창포는 지금의 인천항 일대를 아우르는 말이었으며, 만호는 종4품에 해당하는 사령관이었다. 제물포는 조선 초기부터 경기 일대 유력한 군항이었던 것이다.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을 배치한 제물량영엔 주둔 병력만 500여 명에 달했다. 제물량영은 조운선을 호송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인천 앞바다와 강화도 일대는 고려 시대부터 삼남 지방의 곡식을 서울로 운반하던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던 것이다. 요지였던 제물포가 ‘한적한 어촌’으로 남기 시작한 때는 제물진이 효종 7년(1656) 강화도로 이전한 이후부터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제물포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한다. 종교, 교육, 음악, 의료 등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며 제물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만개한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10일 미군정청은 인천의 이름을 ‘제물포시’로 바꾸었으나 얼마 안 가 다시 인천부로 환원하기도 했다. 제물포가 미추홀구 도화동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1963년 ‘숭의역’ 역명을 ‘제물포역’으로 바꾸면서부터다.
민선 8기의 공약 1호는 ‘제물포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이다. 인천 내항 일대를 역사·문화·해양관광·레저 중심의 하버 시티로 조성하는 프로젝트다. 유정복 인천시장 취임식을 인천 내항 8부두 상상플랫폼에서 개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시드니Sydney나 나폴리Napoli 못지않은 아름다운 항구도시 인천을 향한 대장정이 시작됐다. 제물량으로 시작한 제물포의 찬란하고 도도한 역사가 제물포 르네상스로 꽃피어난다.


하버파크호텔에서 내려다본 인천 내항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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