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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⑲ 문학산성

2022-07-06 2022년 7월호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치열한 영토 전쟁 흔적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지금으로부터 2040년 전인 B.C. 18년. 백제의 왕손인 ‘비류’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길을 나섰다. 아버지 주몽이 부여에 있던 첫 부인 예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리’를 고구려로 데려와 태자로 책봉했기 때문이다. 먼 길을 걸어 비류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높이 213m, 동서 약 2.5km의 크지 않은 문학산이라지만 그 줄기가 미추홀구 문학·관교·학익동과 연수구의 선학·연수·청학·옥련동까지 뻗어 내리는 땅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비류는 그렇게 자신이 터를 내린 땅에 ‘미추홀彌鄒忽’이라는 왕국을 세운다. 인천의 시조가 세운 ‘비류백제’의 탄생이다.
인천 사람들은 문학산을 ‘배꼽산’이라 불러왔다. 산봉우리의 봉화대가 사람이 배꼽을 드러내고 누워 있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성산城山으로도 불렸는데 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을 관아 남쪽의 안산案山으로 여겨져 남산으로도 칭했다.
문학산 일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으로 그 흔적이 바로 ‘문학산성’(인천시 기념물 1호)이다.


문학산 정상을 테를 두른 것처럼 빙 에둘러 쌓은 문학산성은 처음 토성이었으나 석성으로 개축돼 오늘에 이른다. 높이 1.5m~4m, 길이 577m에 이르는 성벽 가운데 339m가 남아 있으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벽은 220m 정도다. 일정한 크기로 자른 돌을 다듬지 않은 채로 쌓았는데, 아랫부분은 무겁고 긴 돌을, 윗부분은 작고 가벼운 돌을 안쪽으로 들여쌓는 방식으로 축조해 견고하다. 문학산성은 임진왜란 땐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이 백성들과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친 ‘승전의 성’이기도 하다.
문학산 정상이 지금처럼 평지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미군이 주둔(1962~1979년)하면서 산 정상부를 평평하게 깎아놓았기 때문이다. 미군이 철수한 뒤엔 우리 공군 ‘나이키미사일’ 통제소가 있었는데, 1998년 인천 봉재산 미사일 오발 사고 이후 2005년 영종도로 이전한다. 인천시는 군 당국과의 꾸준한 논의와 설득 끝에 문학산 정상을 2015년 10월 시민에게 개방했다. 이후 개방 시간이 점차 확대됐으며 봄·가을로 문학산음악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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