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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인천무형문화재와 차 한잔

2023-03-02 2023년 3월호


처마 끝에 반짝이는 의 세계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안영우 포토그래퍼




전통 건축물에 피어난 꽃. 단청丹靑은 붉고 푸른 빛깔을 가리킨다. 붉은색의 원료인 ‘단사’와 푸른색의 원료인 ‘청화’의 줄인 말이다. 이 색깔을 띤 돌들을 갈아 기둥이나 처마 등 건축물 내외부에 칠하는 것이 단청의 기능이다.
“황·청·백·적·흑 오방색으로 불화, 고분, 석조건축, 공예품 같은 여러 조형물에 문양과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것까지를 포함하지요.”
정성길(66) 단청장. 영종도가 고향인 그는 열일곱 살에 단청을 시작해 반세기 동안 전국을 누비며 그림을 그려왔다. 인천의 사찰들 가운데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제가 어렸을 때 영종도에 국민학교가 3개 있었는데 소풍을 늘 용궁사로 갔어요. 그때부터 대웅보전에 그려진 단청을 자연스럽게 접했지요. 조금 더 자란 어느 날, 절에 다니시던 어머니를 따라 영종도 용궁사를 갔는데 그날 따라 법당의 빛깔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는 겁니다.”
갑자기 무엇에 홀린 듯 단청을 하겠다는 아들에게 그의 부모는 처음엔 걱정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결국 ‘부처님의 뜻인가 보다’ 하시며 허락을 해주셨지요.”
1974년, 단청을 배우기 위해 그는 경남 양산 통도사로 들어간다. 화승들이 모여 살던 사찰이었다. 정 단청장은 이곳에서 혜각(1905~1998,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스님과 김준웅(1941~2010) 단청장을 스승으로 모신다. 손끝이 갈라지고 손가락 마디 부기가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 붓을 잡았다. 깊은 산중에서의 단청 작업은 힘겹고 고독했다.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오랜 기간 사찰에 머물러야 했다. 간첩으로 의심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고, 주민등록이 말소된 적도 있었다.
“작업을 시작하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년씩 절에 머물러야 합니다. 머리 까만 사람이 절에 머무르다 보니 형사들이 찾아와 당신 간첩 아니냐며 조사를 하곤 했지요.”
그렇게 사찰, 궁궐, 관아 등 수백 곳의 단청 작업에 참여하며 그는 장인으로 성장한다. 전국을 누비던 정 단청장이 독립해 고향에 정착한 때는 1986년. 인천 수도사 ‘삼천불전’ 작업을 하면서다. 단청은 보통 여러 사람이 각자 자신이 칠할 색을 맡아 일을 진행한다. 독립한 이후 50여 명의 사람을 데리고 일할 때가 있을 만큼 하루가 다르게 그를 찾는 사람은 늘어만 갔다. 그렇게 2004년엔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2009년엔 신포동에 그의 호를 딴 ‘혜명단청박물관’을 개관한다.
“고건축물 보수 공사 때 나오는 조각품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모으기 시작한 게 2,000점이 넘더군요. 그걸로 박물관을 차렸어요.” 혜명단청박물관은 유물 전시관이면서 전통문화 교육·체험 장소로 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하는 개항장의 명소가 됐다.
“단청은 건축물을 잘 보존하고 잡귀를 쫓는 목적이 있습니다. 건축미를 살리는 것은 물론이지요.” 정 단청장은 “우리 조상들은 색깔에 민족의 정서와 삼라만상의 질서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며 “색동저고리에도, 국수 위에 올린 고명에도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그에게 근심거리가 하나 있다. 단청의 맥을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저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들의 공통된 고민입니다. 직업으로 삼기엔 부담이 크다 보니 배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요.”
그가 잡은 붓끝에서 생명을 얻은 단청 꽃문양이 은은한 봄의 향기를 퍼뜨렸다.

정성길 단청장이 혜명단청박물관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정성길 단청장(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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