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인천무형문화재와 차 한잔
교교한 달빛 타고 흐르는
청아한 저 소리의 근원은
김환중 단소장(인천시무형문화재 제2호)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박재헌 포토 저널리스트
김환중 단소장은 서양음계를 낼 수 있는 구멍 11개의 신단소를 발명했다.
김 단소장이 단소를 든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너와 함께하는 작업은 지금 이 시간이 마지막인 것 같구나. 너는 재주가 있으니 앞으로 이 일을 잘할 것이라 믿는다.” “네, 아버지처럼 문화재는 못 되더라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평생을 단소와 한 몸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장남에게 가업을 이을 것을 유지로 남긴다. 선친의 깊은 눈빛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아들은 아버지 1대 단소장에 이어 2대 단소장이 되었다. 김환중(83). 그는 단소를 만들고 연구하는 일이 힘겨울 때마다 아버지의 삶을 반추한다.
“어려서부터 단소를 만들고 연주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어요. 아버지는 만들기도 하셨지만 단소를 정말 청아하게 부시곤 했어요.”
김환중 단소장의 선친 송파松坡 김용신은 예술적 재능과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여덟 살 때부터 단소를 배우기 시작해 타계하던 74세까지 평생 단소를 품에 간직하고 살았다. 일본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야마구치(山口)현 탄광에서 일할 때도,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선친은 단소를 놓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가 단소장이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저의 커다란 언덕이자 스승이셨습니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김환중 단소장이 아버지를 모시고 인천으로 온 건 1974년, 군대를 제대한 뒤였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단소 명인인 아버지는 1985년 인천시무형문화재 제2호 단소장 보유자가 되었고, 5년 뒤인 1990년 김환중 선생도 단소장 반열에 오른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다 보니 저도 문화재가 되었네요. 제 고민은 한결같습니다. 아버지의 업적에 벽돌 한 장이라도 더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는 단소 제작은 물론 뛰어난 연주자였다”며 “연주에서는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지만 제작에서만큼은 더 잘하려고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소는 앞뒤로 5개의 구멍을 뚫어 ‘중·림·무·황·태’ 5음계 중심의 소리를 내는 우리나라 전통 목관악기이다. 따라서 세계 공통 음계인 12음을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 같은 단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발명한 것이 구멍이 11개인 ‘신단소’이다. 신단소는 웬만한 음악은 연주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단소를 만드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다. 대나무 채취부터 다듬기, 내공 뚫기, 외부 손질과 실 감기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환중 보유자는 ‘활비비송곳’처럼 단소 제작에 필요한 제작 도구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 손이 닿아야 제대로 된 단소가 탄생합니다.”
그는 “단소는 본디 하늘에서 만들어주는 악기”라며 “자연에 더해 사람의 영혼과 온기가 깃들 때 좋은 악기가 나온다”고 강조한다.
“햇빛과 맑은 공기 속에서 자란 대나무를 잘 선별해 좋은 소리가 날 수 있도록 속을 적당히 비우고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크기의 구멍을 잘 뚫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환중 보유자 집안의 단소 계보는 3대로 이어지고 있다. 차남 김선민(46) 씨가 전승교육사(전승조교)로 지정받아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초여름 단소장의 작업실. 활비비송곳으로 대나무에 구멍을 뚫는 소리가 교교한 달빛처럼 흘러내렸다.
김환중 단소장은 자신이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은 것처럼 아들에게 단소를 전수하는 중이다. 차남 김선민(왼쪽) 씨가 아버지 김환중 단소장과 함께 단소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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