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인천에서 인천으로 : 여름을 살아내는 사람들
삶의 온도가 여름을 깨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성재·김경수 포토디렉터
1 손끝에서 익어가는 계절
삼산농산물도매시장, 상인의 여름
얼음을 깨며 여는 새벽, 손끝의 온도가 하루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이른 새벽, 해는 아직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나 붉게 달아오른 이마엔 어느새 한 줄기 땀이 흘러내린다. 그 뜨거운 숨결 위에서 계절은 조용히 숨을 고른다.
부둣가 너머 바다는 여전히 잠들어 있지만, 얼음을 짊어진 어깨엔 이미 한낮의 무게가 내려앉는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냉기, 스며드는 땀방울, 묵묵히 이어지는 몸의 움직임. 거친 숨결 사이로 하루가 소리 없이 쌓여간다. 계절은 그렇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체온으로 완성된다. 삶의 온도가, 이 여름을 뜨겁게 일깨운다.
탐스러운 과일들 사이로 흘러드는 계절
도시의 불빛은 아직 숨죽이고 있다. 삼산농산물도매시장 깊숙이 어둠과 습기가 뒤엉킨 틈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선다. 스위치를 켜자 낡은 형광등이 불규칙하게 깜빡이고, 상자에 맺힌 이슬이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하루가 그렇게 조용히 고개를 든다. 과일을 고르는 눈빛, 상자를 들어 올리는 손. 시장 바닥은 색색의 과일 상자들로 빼곡하다. 참외와 수박이 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여름도 함께 따라 들어온다.
“참외가 먼저 여름을 알리죠. 수박은 그다음이에요.” 그는 손으로 계절을 먼저 알아채는 사람이다. 껍질의 탄력, 빛깔의 단단함, 묵직한 무게.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감각이 손끝에 먼저 닿는다. “당도는 껍질에서 느껴지고 식감은 무게로 알아요. 손이 먼저 기억하죠.”
삼산농산물도매시장 상인 최용환(57). 23년 전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계절을 몸으로 겪고 삶을 손끝으로 배웠다. 쉴 새 없이 오가는 리어카, 축축한 공기, 땀과 목소리가 뒤섞인 시간들. 그 모든 것이 그의 하루를 쌓아 올렸다.
계절은 새벽 두 시, 하루를 견디는 손끝에서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익어간다.
다정한 손길로 정을 건넨다. 그의 하루는 마음으로 시작된다.
땀이 흐른다. 계절은, 삶을 살아내는 이들의 체온으로 완성된다.
그는 이곳을 ‘일터’라 부르지 않는다. “제 삶이에요. 자는 시간 빼곤, 늘 여기 있었죠. 숨 쉬듯 그렇게요.”
손님들이 오가는 사이 그의 인사는 멈추지 않는다. “이거 달아요, 잘 익었어요.” 그 말에 믿고 웃으며 다가서는 얼굴들. 한자리를 오래 지키다 보니, 아이 손을 잡고 다시 찾아오는 단골도 많아졌다. 짧은 안부와 익숙한 눈빛, 스치듯 오가는 말 한마디에 쌓여온 시간의 무게. 그 정이 어디서부터였을까. 그가 문득, 어린 날의 여름 한 조각을 꺼내 놓는다. 모래바람 날리던 밭 귀퉁이. 햇살보다 뜨거웠던 땅. “어머니가 참외를 몰래 쥐어주셨는데, 왜 그게 그렇게 맛있었는지….” 이야기는 거기서 멈춘다. 그가 말없이 작업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본다. 다하지 못한 마음이, 말보다 오래 그 자리에 머문다.
시장에도 계절이 있다. 장마철엔 비를 맞고 폭염엔 바람 한 점 없는 천막 아래서 땀에 젖는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이때가 제일 활기차요. 바쁘고 힘들수록 시장이 살아 있는 것 같거든요.” 과일 상자를 어깨에 올리며 그가 웃는다. 땀이 비오듯 해도 걸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천막 너머로 새벽빛이 스며든다. 굳은 어깨 위로 땀의 기억과 살아온 날들이 차곡히 얹힌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계절은 새벽 두 시, 하루를 견디는 손끝에서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익어간다.
냉기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눈빛. 얼음을 가르는 이 순간, 계절보다 먼저 하루가 깨어난다.
2 여름의 속도
연안부두 얼음창고, 세 청년의 여름
새벽 네 시 반. 인천항 바다는 아직 잠들어 있다. 부두 끝에 내려앉은 어둠이 바람보다 느리게 흔들린다. 그 정막을 가르며 거대한 셔터가 열린다. 덜컥, 철문이 밀리는 둔탁한 소리. 곧이어 냉기가 안개처럼 밀려 나온다.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차디찬 기운이 몸속 깊숙이 파고든다. 영하 25도, 연안부두의 한 얼음창고. 계절보다 먼저 깨어나는 세 청년이 있다. 정성욱(29), 전종웅(26), 최양석(26). 인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어둠을 가르고 얼음을 짊어진 채 하루를 시작한다.
창고 안은 영하 25도, 바깥도 영상 3도 남짓. 얼음을 멘 어깨 위로 냉기가 내려앉고,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서늘함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장화 속 발끝부터 감각이 서서히 무뎌져 간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귀를 때리는 기계음에 맞춰 얼음을 들고, 나르고, 쌓고, 다시 옮긴다.
“여름엔 물량이 겨울보다 열 배는 많아요. 얼음이 녹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니까, 숨 쉴 틈도 없어요.”
짧은 숨, 바삐 움직이는 손. 입김은 허공에 닿기도 전에 흩어지고 목소리는 냉기 속에 묻혀버린다. 하루 12시간, 때론 그보다 더 긴 노동이 이어진다. 장마엔 비에 젖고 폭염엔 얼음 위에서도 땀에 흠뻑 젖는다. 그럼에도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속도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멈춤 없이 움직이며 온몸으로 하루를 밀고 나간다.
“우리에게 여름은 비릿한 바다 냄새, 얼음 깨지는 소리, 그리고 땀에 젖은 옷으로 기억돼요.” 세 청년이 하얗게 웃는다. 그 웃음엔 얼음보다 단단한 자부심이 배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둣가의 청년들은 계절을 짊어진 채
햇살보다 먼저 하루를 걷는다.
얼음을 자르고 옮기고 다시 깨트린다. 그 반복적 움직임 속에 청춘의 시간과 땀이 쌓여간다.
연안부두 얼음창고의 세 청년. 태양보다 뜨겁게 같은 계절을 살아낸다.
사 년 전,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한겨울이었다. 눈발이 흩날리던 날, 얼음 박스 200개를 쉴 새 없이 나르며 견디고 또 견뎌냈다. 손끝은 얼어붙고, 찬 기운이 옷 틈을 타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에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한겨울도 견뎠는데, 어떤 계절도 두렵지 않다.’ 그들이 짊어진 것은 단지 노동의 무게만이 아니었다. 네 번의 여름을 지나며 땀으로 다져온 시간은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들은 말한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누군가는 여름을 바다의 풍경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어떤 여름은, 붉게 달아오른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의 온도로 새겨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둣가의 청년들은 계절을 짊어진 채 햇살보다 먼저 하루를 걷는다. 이 도시의 여름은,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체온으로 완성된다. 뜨겁고도 묵묵하게.
키를 움켜쥔 손, 바람을 좇는 시선. 그의 여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 있다.
흔들림 없는 시선, 단단히 선 몸. 그는 파도보다 먼저 하루를 마주한다.
3 바다의 경계에 서서
왕산마리나, 요트안전요원의 여름
바다는 고요하다. 빛이 들지 않은 이른 아침, 선착장 끝에서 물비늘이 천천히 일렁인다. 전날의 햇살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바람은 돛대 사이를 스치듯 지난다. 항해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하루의 파도를 건너고 있다. ‘글라이더스 왕산’의 조한빈(30)은 유년시절을 영종도에서 보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그 끝엔 언제나 수평선이 펼쳐졌다. 기쁠 때도 지칠 때도 그는 늘 바다를 찾았다. 모래턱에 앉아 있으면 소리 없이 곁을 내어주고 어떤 날엔 끝없이 말을 걸었다. 그는 그렇게, 조용한 위로와 속삭임이 머무는 풍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지금, 그 바다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갑판에서는 뛰지 마세요. 구명조끼는 꼭 착용하셔야 해요.” 매일같이 반복하는 말이지만, 바다 위의 상황은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다. 흔들리는 아이의 발끝, 뱃전에 기대선 이의 무심한 시선, 장난처럼 이어지는 실랑이. 긴장의 틈이 생길 때마다 그는 가장 먼저 움직인다. 시선을 피하거나 미간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 한 걸음, 그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고, 때론 생을 지켜낸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순간들,
이름 없는 노력 속에서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손끝에 감긴 바람, 몸에 실린 바다의 무게. 오늘도 고요한 긴장 속에서 그의 하루가 펼쳐진다.
바람도 닻을 내린 오후, 잔잔한 수면 위에, 여름이 잠시 멈춰서 있다.
정오는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선착장엔 그림자 하나 없고, 열기는 바닥을 타고 올라와 피부를 찌른다. 부두를 도는 내내 햇볕이 바늘처럼 꽂히지만,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뒤에도 그의 일상은 계속된다. 구명장비를 닦고, 이끼 낀 바닥을 문지르고, 느슨해진 고리를 조이고, 닳은 로프를 다시 감는다. 언제나처럼 묵묵히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
“스쳐 가는 항해라도, 누군가에겐 오래 기억될 수 있잖아요. 그 시간을 무사히 건네주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바다를 등지고 발길을 돌린다. 불빛이 사라진 선착장에어둠이 내려앉고 수면 위로 느린 바람이 번진다. 그렇게 하루가 저문다.
누군가는 바다를 낭만이라 부른다. 사진 속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노을 아래의 고요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여름엔 설렘도 여유도 없다. 지켜야 할 순간이 있고, 놓쳐선 안 될 감각이 있을 뿐이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순간들, 이름 없는 노력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바람에 젖은 구명조끼, 손끝에 밴 염기, 발끝에 남은 물기. 파도가 지나간 뒤에도, 그의 여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문다.
- 첨부파일
-
- 다음글
- 다음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