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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고단하고 힘들어도, 꽤 괜찮은 삶

2020-01-03 2020년 1월호


 임순례 영화감독·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
 
고단하고 힘들어도,

꽤 괜찮은 삶

 
 
추억 속 삶에도 희로애락은 있다. 그때도 가난한 생활은 고단했고, 모진 세상살이는 힘겨웠으며, 반복되는 일상은 무미건조하게 흘러갔다. 그렇더라도 지난 기억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삶이나,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처럼 소중한 추억은 있다. 영화감독이자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인 임순례에게는 인천 변두리의 변두리, 논밭이 지천이던 부평구 구산동에서의 기억이 그렇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몇 번을 다시 봐도 새로운 영화가 있다. 지루하고 유독 길게 느껴지는 날이면 꺼내어 볼 인생 영화 한 편쯤 없는 삶은 얼마나 무료한가. 인생 영화는 없어도, 떠올릴 때마다 그리운 추억이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많은 이의 가슴에 길이 남을 작품을 안긴 임순례 감독은 남부럽지 않은 추억 부자다. 추억의 무대 대부분은 도심에서 멀찍이 떨어진 부평구 구산동. 30~40분씩 걸리는 학교 가는 길은 걸핏하면 넘어지는 소녀에게 참으로 험난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논길은 왜 그리 미끄럽고, 물길은 어찌 그리 자꾸 나타나는지. 개울에 빠져 떠내려가는 신발이며 가방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아득함, 학교를 코앞에 두고 논에 빠져 진흙 범벅인 채 집으로 돌아가던 허탈함이 일상처럼 반복됐다. 한겨울 추위보다 더 매서웠던 2월 꽃샘추위 속에서는, 길가에 나와 있던 연탄불에 데워진 돌의 온기로 견디며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분명 고생스러운 기억인데,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원망도 미련도 없다. 그래서일까.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웃픈’ 장면들이 아름답고 아련한 한 편의 영화처럼, 동화처럼 그려진다.
 
 
 
감독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부평구 구산동의 기억이 궁금합니다.
인천이 원래 토박이가 많지 않잖아요. 저희 부모님은 충청도에서 인천으로 1948년에 오셨어요. 어릴 때 구산동은 충청도, 전라도 시골에서 일을 찾아온 사람이 대부분인, 가난한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근처 백마장에 있던 미군 기지에서 일하셨지요. 아마 허드렛일이었을 텐데, 그래도 날품 파는 노동자들보다는 대우가 좀 나았던 것 같아요. 고지식한 분이라 남들처럼 미군 물건 빼내 가욋돈 만드는 요령은 없었어도, 학용품은 가져다주시곤 하셨지요.
 
친구들이 부러워했겠네요.
그렇긴 한데, 아버지가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마냥 고마워만 할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무학이셨거든요. 그러니 몸 쓰는 일밖에 할 수 없고, 영어를 배우지 못했으니 말도 안 통하고, 그런 것들이 괴로우셨던 것 같아요. 머리가 좋은 분이라 더 박탈감을 느끼셨겠지요. 그 힘든 마음을 술로 달래셨던가 봐요. 그래도 아버지는 저 태어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때부터 7년 정도 금주하신 적이 있어요. 그래서 집에서는 제가 예쁨을 많이 받는 막내딸이었지요.
 
 
그 동네에서는 언제까지 사셨나요?
대학교와 대학원은 서울로 갔는데, 집에서 계속 다녔어요. 20대 후반에 프랑스로 유학 가면서 인천을 떠났지요. 어머니랑 큰오빠 가족은 지금도 구산동에 사시고요.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를 인천에서 보내신 거네요.
그 시간이 감독님 영화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겠지요. 제 영화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평가들 해 주시는데, 모두 배고픈 시절 유난히 어려운 동네에서 살았던 경험 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천에서도 시골 동네에서 자라 자연이 친숙해 ‘리틀 포레스트’ 같은 영화도 찍을 수 있었고요. 사실 제작자들은 내켜하지 않았지만, 제가 사계절을 꼭 담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평범해서 더 아름답고 소중한, 그런데 자꾸 잊혀가는 한국의 시골 풍경을 계절별로 담아서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때론 영상이 스토리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위원장을 맡고 계신 인천영상위원회의 역할도 그런 영상의 힘과 연결되는 거겠지요?
인천이 매력적인 촬영지가 되어 도시의 가치를 널리 인정받도록 지원하는 것이, 인천영상위원회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또 다른 일은 인천에 있는 영상 인력, 즉 젊은 영화인들을 키우는 거예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제작비도 지원하는 거지요. 더 많은 인천 시민이 다양한 영상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인천영상위원회가 이런 역할들을 비교적 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에서 언젠가 꼭 영화에 담고 싶은 곳 있으세요?
사실 공간을 먼저 생각하고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지에 달려 있겠지요. 그래도 언젠가 인천의 섬이 품은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담아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영화감독의 한 사람으로서 인천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서울과 굉장히 가까우면서도 고유한 특색을 간직하고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깊이에서 비롯된 ‘원도심의 아우라’가 대표적이지요. 그런가 하면 송도국제도시는 서울의 어느 도심보다 세련된 풍경이 있고, 강화도 같은 곳은 아직 시골 분위기가 남아 있고요. 또 강도 있고, 바다도 있잖아요. 그 바다에 항구와 섬이 있고요. 영화에 필요한 거의 모든 공간을 갖춘 곳이 바로 인천입니다.
 
 
지난해 ‘2019 인천국제디자인포럼’에 참여하셨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인천은 시간의 유산과 천혜의 자연을 품은 도시입니다. 그런 것들이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눈앞의 경제 논리만 앞세워 오랫동안 만들어진 풍경을 무너뜨리면 다시는 복구하기 어렵습니다. 포럼에서도 이런 취지로 말씀을 드렸고요. 인천이 가진 역사적, 환경적, 예술적 자산들을 관통하는 도시 브랜드를 만들고 다듬어간다면, 인천만의 가치를 찾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천 시민들부터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가려진, 인천만의 정체성에 대해 인식하고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한창 다음 영화를 준비 중이시지요?
새 영화를 포함해서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에 대해 들려주세요. 요즘 ‘교섭’이란 작품의 프리프로덕션 중이어서 정신없이 바쁘네요. 배우 현빈과 황정민의 캐스팅이 확정되어 올 3월부터 촬영을 시작하는데, 해외에서 찍어야 해서 준비할 게 많아요. 2007년 분당 샘물교회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한 선교사들이 탈레반에 피랍된 사건을, 우리 외교부의 협상 노력에 초점을 맞춰 영화화하려고 합니다. 이번 영화든 앞으로 만들 작품이든, 감독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하나예요. 작품을 통해서 대중과 최대한 소통하는 거지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장에서 배우 김태리와 함께.
 


추억의 무대 대부분은
도심에서 멀찍이 떨어진 부평구 구산동.
분명 고생스러운 기억인데,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노라면
그 ‘웃픈’ 장면들이 아름답고
아련한 한 편의 영화처럼, 동화처럼 그려진다.

 
 

임순례 감독의 이야기는 인천시 발행 단행본 <인천, 사람>에도 담겨 있습니다.
책을 받고자 하시는 분은 인천광역시 소통기획담당관실 홍보콘텐츠팀(032-440-8305)으로 문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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