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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내가 사랑하는 인천-전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회장 유필우

2020-09-01 2020년 9월호

인천은 내게 자부심을 준 도시
글 유필우


20대 때 송림동 동네 아이들과 함께


내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이다. 6·25전쟁 직후 우리 가족은 험난한 과정을 거쳐 인천에 정착했다. 인천시 동구 송림동 39번지가 본적이자 주소지가 되었다. 나는 송림동 배다리에 있는 송림초등학교에 전학했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고 내가 살던 송림동 일원, 수도국산, 배다리는 6·25전쟁 피란민과 인천에 새로 이주한 가족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였다. 비가 오면 동인천역 철로 주변 ‘참외전거리’나 배다리 중앙시장(양키시장) 근처는 장화 없이 다니기 어려웠다. 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 수도나 우물물을 받아 물지게로 날라 오는 것은 우리 형제들의 몫이었다.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웠을 때 흐뭇해 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그립다. 어려서 6·25전쟁의 참상과 어려움을 직접 경험한 나는 송림동 배다리가 자랑스럽고 너무 좋았다. 골목을 누비고 친구들과 어울려 송림초등학교의 새로운 생활을 한껏 즐겼다. 이때 함께 배우고 사귀었던 친구들은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면서 지금도 가장 가깝게 지낸다.


송림동 우리 동네는 ‘똥고개’라고도 불렸는데 근처에 바닷물을 담아놓은 큰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 뚝방 너머는 바다였다. 지금은 육지가 되어 많은 공장과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때 지금의 서구 지역은 바다 건너 ‘개건너’였다. 여름이면 헤엄치고 망둥어 낚시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 앞쪽에는 돌부처 석상이 있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부처산’이 있었는데 현재의 재능대학, 청운대학이 자리한 곳이다. 부처산과 배꼽산(문학산)에도 자주 놀러 다녔다. 그곳에 ‘싱아’라는 야생 식물이 널려 있었고 싱아 줄기를 꺾어 씹으면 시면서도 달콤한 즙이 나와 목을 축이곤 했다. 그 많던 싱아는 지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나는 이곳 송림동에서 초중고교와 대학은 물론이고 내 젊은 날의 대부분을 보내며 인천 사람이 되었고 송림동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젊은 날의 추억과 즐거웠던 기억들은 내 마음 깊은 어느 곳에 내재해 있을 뿐 인천은 어떤 도시이며 나와 인천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적극적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송림동, 배다리 동네에는 분단과 전쟁,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개척과 도전의 인천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직 인천은 내 젊은 날 삶이 거쳐온 추억의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유공원인천기상대 앞에서
(사진 뒤 맨 오른쪽이 필자)


1974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중앙경제부처와 청와대 등에 근무할 때 내가 인천에서 공직을 맡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공직 생활 중 내 뜻과 달리 두 번이나 인천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첫 번째는 중견 공무원으로 인천시 지역경제국장과 북구청장(지금의 부평구, 계양구)을 역임했다. 비로소 내가 사는 인천, 내가 함께하는 인천 시민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인천시 정무부시장으로 돌아왔다. 중앙부처의 국장으로 정신없이 일하던 어느 날, 평소 교분이 없던 최기선 인천시장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인천시 정무부시장을 맡아주세요. 당신은 인천 사람이고 행정 경험을 두루 쌓아온 경제 전문가이니 누구보다 잘할 것입니다. 인천을 위해 함께 일합시다.” 그는 송도미디어밸리 개발을 국책 사업으로 지정받고,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을 함께 묶는 ‘트라이포트’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함께 일할 적임자를 찾던 중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인천정무부시장이 되어 최기선 시장이 추진하던 ‘트라이포트’ 프로젝트를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아무리 일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내가 사는 인천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며 내가 이곳을 위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공직을 떠난 후 수년간 인천사회복지협의회장을 맡았고, 미추홀구의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마지막으로 인천을 진정 아끼는 이들이 만든 범시민운동협의체인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회장이 되었다. 인천에서 행정가로, 정치인으로, 사회복지사업가로, 인천사랑운동가로 일하게 된 것은 모두 인천 시민들이 나를 키워주고 인천과 함께한 결과였다. 인천은 이제 소년의 삶이 거쳐온 비루한 곳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함께하면서 변화시키고 사랑해야 하는 숙명적인 대상이 된 것이다. 인천은 전국에서 모인 분들이 함께 일구어온 도시다. 인천에 정착하면서 갖은 고생 끝에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일으켜 자식들을 키워온 개척과 도전의 땅이다. 도시의 다양성, 효율성, 다문화성이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높고 지리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다.
인천에 대한 자부심과 애향심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인천이 갖고 있는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중앙부처나 타 시도로부터 홀대받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인천 발전의 원동력은 자부심과 애향심이다. 우리는 인천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인천 시민의 의무요 권리다. 이 일을 위해 부족한 나의 힘을 더 보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유필우(75) 전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회장은 인천에서 송림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를 다녔다. 행정고시에 합격, 중앙부처와 청와대에 근무한 뒤 최기선 인천시장 시절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퇴직 후 인천사회복지협의회 회장과 국회의원,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인천 사랑을 실천해 온 인천의 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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