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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인천의 아침 -인천 행정구역 개편史

2022-11-01 2022년 11월호



인천 행정구역 개편史


영종대교 Ⓒ셔터스톡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인천도 아닌데 부천의 지역번호가 왜 ‘032’인가 궁금했다. 인천 바로 옆에 붙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화국에서 편의에 따라 정한 것일까. 부평富平의 ‘富’ 자와 인천仁川의 ‘川’ 자를 합해 ‘부천富川’이란 도시명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천과 부평은 본래 각각의 진산 아래 도호부를 둔 다른 지역이었다. 문학산 아래 인천도호부가, 계양산 아래 부평도호부가 있는 까닭이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택시를 타고 간석오거리를 넘으면 2000원의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지리·정서적으로 인천과 부평은 얼마간 차이가 있었던 셈이다.
인천과 부평이 처음 합쳐진 시기는 1914년이다.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이 시기 인천 부역府域을 크게 축소한다. 일본인 거주지에만 도시 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 중심의 정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인천 부역에서 제외된 지역이 부평 지역과 합쳐져 신도시 격인 ‘부천군’에 편입된다.
식민 경영을 강화하고 대륙 침략 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일제는 다시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1936년 부천군에 편입시켰던 문학면의 학익·옥련·관교리와 다주면의 도화·용정(용현동)·사충(주안동)·장의(숭의동)·간석리를 인천부로 환원시킨 것이다. 세원 확보를 위해서였다.
이듬해 중일전쟁(1937) 발발을 계기로 경인시가지계획(1940)이 세워지며 부천군의 서곶·문학·남동·부내면(부평)이 인천부에 추가로 편입된다. 공장과 거주지, 식량 공급 기지 권역으로 묶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인천은 1910년 인천도호부의 부역에 더하여 부평까지 차지하며 비약적으로 커진다.
1960~1970년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인천의 성장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1981년 인구 100만의 직할시가 됐고, 1995년엔 광역시로 승격하며 강화와 김포 검단, 옹진군을 끌어안는다. 도시와 농촌을 통합한 국토개발계획의 결과였다. 여러 기능의 입지 공간을 확보한 인천은 비로소 ‘세계 초일류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인천시가 지금 추진하는 행정 체제 개편은 중구와 동구를 ‘제물포구’와 ‘영종구’로 조정하고, ‘검단구’를 신설하는 것이 골자다. 1995년 이후 행정·사회적 여건이 크게 변했음에도 2군 8구 체제가 그대로여서 시민 불편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중구는 영종도와 생활권이 분리돼 있어 영종도에 제2청사를 여는 등 행정 이원화에 따른 비효율성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영종도는 외국인을 포함해 인구 10만 명을 넘기며 분구 얘기가 계속 나왔었다. 서구의 경우 인천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면적도 동구·미추홀구·계양구·부평구를 합친 것보다도 크다. 여기에 검단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크게 늘면서 분구 논의가 꾸준히 이어져온 게 사실이다.
인천의 행정 체제가 시대 변화 여건에 따라 ‘2군 9구 체제’로 조정되면 인구와 생활권에 걸맞은 행정으로 시민 삶의 질은 한결 좋아질 것이다.



서구 연희동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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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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