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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재 ⑮ 광성보
진달래로 피어난
조선군인의 넋들을 만나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1871년 6월 11일 강화도 광성보廣城堡(사적 제227호) 앞바다가 검붉게 물들었다. 거대한 괴물 같은 미 함대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목숨 걸고 싸운 조선군 수백 명이 흘린 피였다. 151년 전, 광성보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1871년 4월 최첨단 무기와 1,230여 정예 병력으로 무장한 미국 로저스(John Rodgers) 함대는 통상을 명분 삼아 조선에 개항을 강요해 온다. 그러나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자 초지진, 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한 뒤 조선 최후의 보루인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한다.
광성보엔 그러나 조선의 명장 어재연(1823~1871) 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진무중군(강화도에 본영을 두고 바다를 지키던 진무영鎭撫營의 정3품 관직) 어재연은 600여 조선군을 이끌고 격렬하게 전투에 임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최신식 무기라고 해야 화승총 몇 자루가 전부였던 조선군이 최신예 함포를 쏟아붓는 미군을 대적하기란 중과부적이었던 것이다.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가 10명인 반면, 조선군은 전사자만 350명, 부상자는 20명에 이르렀다. 어재연 장군은 제대로 된 현대식 총 한 자루 없는 상황에서 동생 어재순과 함께 600여 조선군의 선두에 서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다 장렬히 전사한다.
조선의 피해가 막심했으나 미국이 승리한 건 아니었다. 함포 몇 발에 즉각 개항한 중국,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문을 더 단단히 걸어 잠근 것이다. 미 함대는 조선군의 상징인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만 전리품으로 탈취한 채 제 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미전쟁(신미양요, 1871)에 참전했던 슬라이(Winfield Scott Schley) 해군소령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원정대가 출항하기 전 나돌던 무수한 소문들과는 달리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을 한 자루도 소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승총(jingalls) 같은 몹시 노후한 병기로 근대적인 무기에 훌륭히 맞섰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웠다. 영웅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진지를 사수하다가 전사했다. 어떤 나라의 장병도 고국을 위해 이보다 더 잘 할수는 없을 것이다”(<회고록> 95쪽). 미군들은 당시 조선군의 기개를 높이 평가해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을 정중히 매장해 주었다고 전한다.
강화군 불은면 광성보는 염하(강화해협)를 지키는 강화12진보 가운데 하나의 요새다. 광성보의 정문인 안회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신미순의총, 용두돈대, 쌍충비각, 손돌목돈대 등을 만난다. 신미순의총은 이름도 성도 남기지 못한 채 전사한 조선군 51인의 시신을 합장한 곳이며, 용두돈대는 암반 위에 설치한 천연 요새로 용의 머리를 닮아 붙은 이름이다. 어재연·재순 장군 형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 쌍충비각도 눈에 들어온다. 용두돈대에서 김포 방향으로 보이는 작은 무덤은 고려 고종임금 당시 뱃사공 손돌의 묘로, 무덤이 보이는 지점을 손돌목돈대라 부른다. 갑옷 입고 큰 칼을 찬 어재연 장군을 닮아 보이는 광성보의 아치형 정문 안해루를 지나자 카키빛 바다와 새싹이 움트는 산책로가 펼쳐진다. 봄 햇살을 닮은 사람들의 얼굴과 울긋불긋한 봄 꽃나무들. 풍전등화의 조국을 지키려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얼은 광성보 앞바다의 윤슬로 반짝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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