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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초일류도시를 가다 ④ 영국 리버풀
유럽문화수도로 위대한 변신 리버풀Liverpool 도시재생 스토리
허름한 작은 클럽에서 공연하기 시작해 전설적 뮤지션으로 이름을 남긴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 과거 산업혁명과 노예무역을 통해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어 주었던 리버풀의 노후한 항만시설은 문화유산에 중점을 둔 도시재생 사업을 거쳐 세계적 명소로 자리매김했고, 그 결과 리버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및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되었다. 쇠퇴한 항만도시가 세계적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사례를 리버풀을 통해 살펴본다.
글 이현아 인천광역시 문화기반과 학예연구사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영국 리버풀의 항만 전경
인천을 닮은 국제 항구도시
영국의 중서부이자 잉글랜드의 북서부에 위치한 리버풀은 한반도의 중서부, 남한의 북서부에 위치한 인천과 비슷한 지역성을 띤 도시다. 북대서양을 통해 세계 각국으로 쉽게 뻗어나갈 수 있는 곳에 자리한 리버풀은 이 같은 입지적 장점으로 영국의 중요한 항구도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715년 영국 최초로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한 갑문이 건설되어 일찍이 큰 배들이 드나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고, 부두시설 주변으로는 국제 항구도시의 면모를 보여주듯 부를 반영한 다양한 건축물이 지어졌다. 특히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는 영국 최대 무역항으로 성장해 영국 무역 대부분이 이 항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1801년 인구 7만 8,000명이던 리버풀은 1901년 68만 5,000명이 사는 대도시가 되었고, 20세기 초에는 ‘대영제국 제2의 도시’로 손꼽히게 되었다. 인천 역시 입지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제 항구도시로 성장하게 되었고,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을 통해 각종 근대 문물이 우리나라에 도입되기에 이른다.
영국 이민 역사의 한 페이지 장식
리버풀은 영국 이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1807년 영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던 노예무역이 폐지되면서 리버풀의 선박은 수많은 이민자로 채워졌다. 이곳은 북아메리카로 이주하는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에게 주요한 출발항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RMS 타이타닉호를 포함한 여러 유명 이민선의 모항이 바로 리버풀이었고, 이 타이타닉호에 승선한 승객과 선원 중 리버풀 출신도 상당수였다.
더불어 리버풀은 영국으로 들어오는 각국 이민자가 첫발을 내디딘 입국항이기도 했다. 1860년대 후반 해운 회사들이 중국인 선원을 고용하면서 중국 이민자가 처음으로 리버풀에 유입되었고, 리버풀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인 공동체의 본거지가 형성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인 하와이 이민이 인천을 통해 시작되었고, 19세기 말 형성된 인천 차이나타운도 현재까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리버풀은 인천과 공통점이 많다.
근대 교통 발달에 선도적 위치 차지
리버풀은 근대 교통이 발달하는 데도 선도 역할을 한 도시다.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된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1830년에는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연결하는 영국 최초의 도시 간 철도가 건설되었다. 철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상품을 효율적으로 리버풀 항구에서 영국 전역으로 운송할 수 있게 했으며, 세계 최초로 상품뿐 아니라 승객까지도 정시 운송하는 시스템도 갖추었다. 또 1893년에는 세계 최초의 고가高架 전기철도가 완성되었고, 1930년에는 영국 최초의 지방 공항도 건립되었다. 인천도 우리나라 최초로 도시 간 철도가 건설된 곳이자 산업화의 기본 조
건인 교통 발달이 다른 도시보다 먼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리버풀과 유사하다.
쇠락한 항만시설 재건해 문화도시의 메카로
리버풀은 영국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 전초기지가 되어 런던 못지않게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다. 20세기 전반기까지 번성했던 리버풀은 전쟁의 피해와 산업 구조의 변화로 쇠락해 갔고, 점차 그 독보적 위치를 잃어 갔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리버풀의 주력 사업이었던 항만과 중공업이 쇠퇴하면서 많은 일자리가 사라져 실업률이 17%까지 치솟았다.
리버풀시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경제 활성화를 위한 도시재생사업에 착수했다. 도시재생사업의 핵심 콘텐츠는 바로 리버풀이 지닌 문화유산이었다. 리버풀시는 항만시설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창고 건축물을 개조해 1988년 현대미술에 집중하는 세계적 미술관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을 유치했다. 이어서 1990년에는 비틀스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일련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비틀스 박물관Beatles Story을 개관해 전 세계 관광객을 유혹했다. 이와 함께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을 리모델링하고 국제노예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과 리버풀 박물관Museum of Liverpool을 개관하는 등 산업혁명과 노예무역의 거점 항구였던 리버풀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 공간에 중점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과거 영국의 관문 역할을 했던 항구는 이제 문화도시의 메카로 재탄생했다. 리버풀의 지역성을 담은 문화시설이 부두를 에워싼 붉은 벽돌 건물에 집중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유무형의 인프라가 구축되었고 식음, 쇼핑, 숙박, 업무 및 각종 편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가 이어져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낙후되었던 항만은 볼거리, 즐길 거리, 먹거리가 가득한 리버풀의 대표적인 문화관광 단지로 부상했다.
전 세계 관광객이 찾는 리버풀 출신 밴드 비틀스의 동상
유럽문화수도 선정,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무역의 중심지였던 리버풀은 항만시설의 선구 역할과 역사적 중요성,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리버풀-해양 무역도시Liverpool-Maritime Mercantile City’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하지만 유네스코는 리버풀이 항구 주변에 축구장과 신식 주거시설을 건설하는 등 대규모 재개발사업을 벌여 문화유산의 가치가 손상되었다며 2021년 7월 그 자격을 박탈했다.)
한편, 유럽연합(EU)은 매년 유럽의 도시 중 한 곳을 ‘유럽문화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로 선정해 1년 동안 범유럽 차원의 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도시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최고의 기회를 얻곤 했다. 리버풀시는 체계적 준비 끝에 영국의 버밍엄, 브리스톨 등과 경쟁해 2008년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고,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성장하기 위한 각종 계획을 추진했다. 그 결과 약 50만 명이 거주하던 리버풀은 누적 방문객 수 7,170만 명(2022년 기준)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문화유산을 콘텐츠로 한 도시재생사업이 성공하면서 리버풀은 다시 한번 국제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리버풀은 공공과 민간의 협력을 통해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비엔날레, 페스티벌 같은 국제적 이벤트 유치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문화, 레저, 상업 그리고 주거가 어우러진 새로운 도시 공간으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관광객은 비틀스 멤버의 이름을 딴 리버풀 존 레넌 공항Liverpool John Lennon Airport을 통해 리버풀에 첫발을 디딘 뒤 리버풀의 문화와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박물관과 공연장을 방문하고, 각종 상업시설에서 쇼핑과 먹거리를 즐기며, 도시 전역에 산재한 비틀스의 흔적을 성지순례하듯 따라간다. 그렇게 리버풀이라는 도시를 소비하고, 리버풀 시민들은 연계 사업을 통해 경제적 부가가치를 누리고 있다.
인천과 유사한 지역성을 띤 리버풀의 성공 스토리는 인천 내항을 활성화하는 제물포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초일류도시로 향해 가는 인천이 눈여겨봐야 할 본보기다. 문화유산을 활용해 장기 계획과 시행으로 차근차근 이루어간 리버풀의 성공적 도시재생사업을 거울 삼아 인천도 또 하나의 성공 스토리를 써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복합문화단지로 재탄생한 세계 무역의 중심지, 로열 앨버트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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