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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재 이야기⑦ 자유공원 플라타너스(인천시 등록문화재)
개항 때부터 130여 년간 자유공원 지켜온 아름드리나무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인천 중구청 뒤 남부교육청 앞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샛길이 하나 나온다.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지름길이다. 이 길에 들어서면 어른 두세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는 아름드리 거목이 나타난다. 높이 30.5m, 가슴 높이 둘레 4.7m의 이 나무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플라타너스다. 식재 연도 1884년. 표지석은 이 나무가 뿌린내린 해를 개항 이듬해로 표기하고 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으로 신식 교육, 의학, 종교, 피아노 등 서양 문물이 들어왔다. 많은 외국인이 더불어 제물포 땅을 밟는다. 인천항으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마주치는 응봉산은 외국인들에게 매력적인 땅이었다. 응봉산 자락에 집을 지으면 아름다운 제물포 앞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파티도 열 수 있을 것이었다. 높이 69m의 아담한 응봉산에 외국인들이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했다. 제각기 좋은 자리를 차지한 외국인들은 이제 집주변에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각국공원은 그렇게 탄생했다.북미가 고향인 플라타너스는 이 시기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6월 29일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수령을 감정한 강진택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1883년 개항 직후 미국이나 영국에서 가져온 국내 최초의 플라타너스로 추정된다”며 “외형이 수려한 데다 인천상륙작전 때도 원형을 유지한 채 살아남아 근현대사를 담은 나무라는 점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는 현재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예고됐으며,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 중이다. 각국공원이란 이름
2021-06-29 2021년 7월호 -
소소한 인천사-인천 지명인천 지명
미추홀과 인주 그리고 ‘인천’인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이다. 삼국시대 초기 인천의 이름은 ‘미추홀’이었다. 에는 “매소홀현을 일명 미추홀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매소홀은 고구려 시대의 인천 이름이다. 에도 “인주仁州는 원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며, 일명 미추홀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의 뜻이며 ‘홀’은 성城이나 골로 해석되고 ‘추’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ㅅ’으로 풀이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은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소성현’으로 바뀌었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토박이 말로 되어 있는 땅 이름을 모두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소성현은 ‘경원군’으로 개칭, 승격됐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仁睿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의 고향이 됨으로써 ‘인주仁州’로 개칭됐다. 고려 말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인천은 경원부로 개칭, 승격됐는데, 이는 인천이 ‘7대 어향’이었기 때문이다. 7대 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조선 초기 태조 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되고 태종 13년에 이르러 모든 군이나 현을 ‘주州’로 바꾸는 바람에 인주가 물에 가깝다 하여 ‘인천’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천의 명칭은 한자 풀이식의 ‘어진 내(仁川)’가 아닌, ‘인주 이 씨’에서 유래됐음을
2021-06-29 2021년 7월호 -
仁生 사진관
뜻밖의 행복사연 권영황(부평구 부평동)내 나이 칠십. 비슷한 연배가 그러하듯, 노인복지관은 사랑방이었습니다. 탁구를 치고 댄스 스포츠와 컴퓨터, 포켓볼을 배우며 노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매일같이 친구를 사귀고,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코로나19가 노인복지관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가버렸습니다. 길어지는 ‘방콕’ 생활이 힘들었고, 급기야는 우울증마저 생길 것 같던 찰나, 친구가 ‘노인 일자리’를 소개해 줬습니다. 한걸음에 달려가 접수를 마쳤지만 신청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수십 대 1의 경쟁률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며칠 후 울린 전화벨. “어르신~ 합격 축하드립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소중한 기회를 얻은 만큼 최선을 다하자’. 방역에 온 힘을 다하고, 이곳저곳 환경을 정리하고 쓸고 닦고…. 바쁜 만큼 더 큰 기쁨이 밀려오는 요즘, 하루하루가 행복이고 희망입니다. ‘仁生 사진관’은 일상 속에서 겪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인천을 무대로 살아가고 있는 시민 여러분의 사진과 사연을 보내주세요.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보내주신 사진을 실어드리거나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어드립니다.보내실 곳 : goodmorningic@naver.com 문의 : 시 소통기획담당관실 032-440-8305
2021-06-29 2021년 7월호 -
인천의 아침 칼럼
지나온 40년, 가야 할 40년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하늘에서 본 인천 도심과 인천신항인천시가 1981년 7월 1일 경기도에서 독립해 직할시가 되기 직전, 어머니가 계양구 효성동에 집을 지었다. 남편을 일찍 여읜 어머니는 밥솥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울의 친정집에 중학생 아들을 맡긴 채 부평 지역의 공장을 전전하며 집 한 칸을 겨우 마련한 것이었다. 방학 때만 만날 수 있었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80년대 중반이다. 당시 효성동이 속한 북구는 부평공단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장과 다가구주택들로 넘쳐났다. 인천이 광역시로 승격하기 전인 1990년대 초반 신문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평과 인천을 구분하던 간석동을 넘어 출퇴근하며, 사람들을 만나 밥 먹고 술 마시는 장소도 부평역 일대에서 신포동을 중심으로 한 중구 지역으로 바뀌었다. 똥마당(북성포구)과 화수부두에서 우럭·광어를 먹고, 만석고가교 아래서 주꾸미를 맛보며 인천의 맛을 알게 됐다. 부두를 따라 지어진 빨간 벽돌 창고와 한 세기를 넘긴 근대 건축물들, 자유공원에 올라 바라보는 인천항의 크고 작은 배들은 인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모티브로 다가왔다.사회부 기자로 일선 경찰서를 취재하던 1995년 인천이 광역시가 되며 북구는 부평구와 계양구로 나누어졌고, 남구에서 연수구가 분리됐다. 그해 강화도와 김포군 검단면이 인천광역시로 들어오며 인천의 외형은 커졌고 내치는 더 단단해져 갔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30대 시절엔 인천전철과 인천국제공항이 각각 개통·개항했고 전국 최초로 송도·영종·청라 경제자유구역이 탄생했다. 막 살면 안 되겠다고 자각하기 시작
2021-06-29 2021년 7월호 -
포토 에세이-하늘에서 내려다본 송학동 ‘인천시민愛집’
하늘에서 내려다본 고건축물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습니다.서로 이웃하며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건물들입니다.가운데 짙은 회색 빛깔을 띤 한옥의 이름은 ‘인천시민愛집’입니다.1901년 개인 주택으로 지어져 서구식 레스토랑, 사교장으로 쓰다1966년부터 2001년까지 인천시장 17인이 살며 거쳐 간 곳입니다.2001년부터는 인천시사편찬위원회와 역사자료관으로 사랑을 받던 이 건물이 2021년 7월 1일 시민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날은 인천이 경기도로부터 독립해 인천직할시로 승격한 지 40년이 되는 날입니다. 인천시민愛집에선 아름다운 전시를 관람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으며천천히 걸으며 명상을 하고 가족 간, 연인 간 담소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인천 시민이 사랑하는 집’ 인천시민愛집을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2021-06-29 202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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