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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재 이야기⑫ 보문사 마애관음좌상
‘올 한 해도 열심히 사느라 수고 많았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의 미소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2021 보문사의 마애관음좌상강화도의 형제 섬인 석모도 ‘보문사’에 가면 반드시 찾아야 할 곳이 ‘마애관음좌상’(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9호)이다.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비스듬히 경사진 바위 표면에 돌을 깎고 쪼아 새긴 마애관음좌상은 높이 9.2m, 너비 3.3m의 거석 불상이다.마애관음좌상이 이 자리에 오신 건 1928년이다. 당시 주지였던 배선주 스님은 금강산 ‘표훈사’ 이화응 주지 스님과 함께 이 거대한 불상을 조성한다. 배선주 스님의 첫째 아들인 배정만(91) 옹은 “아버지가 주지로 부임한 뒤 매일 눈썹바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구상했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화응 선사와 함께 바위에 부처님을 새기기 시작해 3년 만에 완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 오직 석공의 손으로만 새긴 것”이라며 “석공의 후손들이 아직까지 석모도에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애관음좌상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병淨甁을 받쳐 든 채 연화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턱까지 내려온 긴 귀와 두툼한 코에선 부처님의 자비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마애관음좌상을 덮고 있는 거석은 ‘눈썹바위’다. 마치 고인돌의 덮개돌처럼 생긴 이 바위는 사람의 눈썹처럼 생겼다 해서 눈썹바위란 이름이 붙었다.목청이 좋고 불경을 잘 외웠던 배선주 스님이 보문사 주지로 오자 보문사는 신도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출생인 배선주 스님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6살에 전등사로 출가했다. 이후 의
2021-11-29 2021년 12월호 -
소소한 인천사 - 인천 지명
자줏빛 제비섬이었던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선 영종도의 본래 이름은 자연도紫燕島다. 자줏빛 또는 보랏빛 제비섬이라는 뜻이다. 에는 이 섬에 대해 “자연도는 인천도호부 서쪽 27리 되는 곳에 있으며 주위가 55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도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고려 인종 때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귀국 뒤에 여러 가지 견문을 모아 엮어낸 의 기록대로 ‘경원정 맞은편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경원정은 고려 때 중국의 사신이나 상인들이 오가는 길에 묵었던 객사로 지금의 구읍뱃터 주변에 있었다. 구읍 일대는 현재 영종도 본 섬과 이어져 하나의 섬이지만, 원래는 조선 후기까지도 자연도에 딸린 조그만 섬으로 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서긍이 ‘경원정 맞은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인데, 김정호의 에도 영종도는 자연도 앞에 조그만 섬으로 떨어져 따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 효종 때 군사적 필요에 따라 화성군 남양면에 있던 군사기지 영종진이 이 조그만 섬으로 옮겨 오게 된다. 그러고 나서 자연도와 다리를 놓아 연결하고는 다리 이름을 만세교라 불렀다. 이때 남양에서 옮겨 온 영종진이 이곳에 자리 잡은 뒤로 계속 같은 이름으로 불리면서 자연도는 차츰 영종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갔고, 마침내는 그 원래의 이름을 밀어내고 이제 제 이름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다. 만세교 역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며, 그 뒤로 계속된 두 섬 사이의 매립에 따라 영종진이 있던 섬과 자연도는 이어지게 됐다.]인천 소사1902. 12. 22 제1차 하와이 이민, 제물포항 출발1902년 12월 22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가의 승인 아래 해외 이민
2021-11-29 2021년 12월호 -
仁生 사진관
안녕, 2021사진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남편을 따라 계양대교 위에 올랐습니다. 푸르렀던 하늘이 서서히 노을로 번지며 붉게 물들었습니다. 평온한 물길도 덩달아 주홍빛 하늘색을 담았습니다. 수줍은 듯 산등성이 아래로 숨어드는 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지금 지고 있는 저 해가 올해의 나쁜 기억들을 모두 집어삼켜주기를, 내일 다시 떠오를 해가 기쁨과 희망만을 품고 세상을 환히 밝혀주기를.’ 다사다난했던 2021년이 저물어갑니다. 지난해 이맘때에도 올해와 같은 소망을 그렸습니다. 다행인 건, 그 소망이 내년에는 이뤄질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코로나19로 얼룩졌던 2021년이, 2022년에는 저 아름다운 석양을 닮은 희망의 빛으로 물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안녕, 우리의 2021년.”사연 박수지(연수구 송도동)‘仁生 사진관’은 일상 속에서 겪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인천을 무대로 살아가고 있는 시민 여러분의 사진과 사연을 보내주세요.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보내주신 사진을 실어드리거나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어드립니다.보내실 곳 : goodmorningic@naver.com 문의 : 시 소통기획담당관실 032-440-8305
2021-11-29 2021년 12월호 -
인천의 아침-칼럼
백령도의 하늘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바다 표면에 얼굴을 내민 채 새까만 눈동자를 깜박거리는 점박이물범, 기암괴석에 달라붙어 쉬고 있는 가마우지 떼. 평화의 섬 백령도에 느닷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때는 1951년 1월이다. 수만 명의 피란민들이 바다를 건너 백령도에 닿았다. 며칠만 참고 계세요, 금세 돌아오겠습니다. 부모, 처자식에게 남겨놓은 그 말이 마지막 인사였다.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가 지나며 바다 한가운데 무거운 장막이 드리워졌다. 사람들은 그걸 북방한계선(NLL)이라 불렀다. 귀향길이 막힌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육지로 빠져나갔다.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꿈에도 잊히지 않는 고향 땅을 등질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대로 섬에 남아 타향에서의 삶을 꾸려나갔다. 음식으로나마 수구초심을 달래야 했다. 피란민들은 고향에서 먹던 냉면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돼지 뼈를 푹 고아 끓여낸 육수에 까나리액젓, 들기름, 겨자, 식초를 적당히 뿌려 먹는 ‘백령냉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백령도에 갈 때마다 다른 건 몰라도 ‘사곶냉면’ 식당을 찾아 백령냉면만은 꼭 먹고 나왔다. 백령도 주민들은 늘 위태로워 보였다. 한밤중 사격 훈련이 있을 때마다 전쟁 터지는 꿈을 꾸고 남북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대피소를 들락거리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호소했다. 먹고사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바다를 생계 터로 먹고사는 어민들은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으로 2중, 3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중국 어선들은 쌍끌이로 치어까지 싹쓸이하는 것도 모자라 주민들의 어구와 어망을 마구 훼손하고 달아난다는 것이었다. 현안 가운데 하나가 주민들
2021-11-29 2021년 12월호 -
포토 에세이
여명의 2022년을 기다리며한 해의 마지막 달모도 배미꾸미조각공원이 석양 노을에 물들어 갑니다. 하늘도 바다에도 물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신묘한 주홍 빛깔이 번지는 중입니다.올 한 해 우린 정말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왔습니다.코로나 방역에 비지땀을 흘렸고, 자원이 순환하는 친환경 세상을 만들기 위해먼저 실천하고, 옆 사람에게 함께 가자고 독려하며뚜벅뚜벅 황소처럼 걸어왔습니다.우리 인천시는 여명의 2022년에도‘인천 시민시장들의 건강과 행복’만을 바라보며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모도 조각상들이 바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2021년 정말 수고 많으셨다고.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2021-11-29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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