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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초일류도시를 가다 ② 홍콩
시대와 세상의 흐름을 타고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다
‘아시아 최대 자유항’이자 ‘동양의 진주’라 불리는 홍콩은 과거 총인구 3,000여 명 남짓한 작은 시골 어촌이었다. 그러던 홍콩이 ‘제3대 금융 중심지’, ‘제7대 해운 중심지’로 도약한 것은 실로 세계 도시 발전 역사상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홍콩이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세계 초일류도시의 지위를 얻게 된 과정을 살펴본다.
글 신진식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교수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
변화의 급물살을 타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 확대 과정에서 1841년 제1차 아편전쟁을 승리하며 홍콩을 할양받는다. 그후 영국은 중국 남부 광저우의 주장강(珠江) 입구에 자리 잡은 우수한 지역적 위치와 수심 깊은 천연 항구라는 지리적 이점을 높이 평가하고, 같은 해 홍콩을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1844년 로버트 마틴 홍콩 재무장관은 이 지역을 포기하자는 보고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른다. 행정 인프라는 빠르게 구축되었으나 빈번한 해적질, 풍토병, 청의 적대적 정책으로 홍콩 정부가 상인들을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부유한 중국인 대다수가 격동하는 중국 대륙을 탈출해 홍콩으로 정착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 홍콩 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편이었다. 결국 아편을 둘러싼 영국과 청나라 사이 일어난 또 한번의 충돌로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로 영국에 주룽반도와 스톤커터스섬을 추가로 이양한다.
이렇게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급속한 경제적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외국인 투자가 유치되고, 이에 잠재적 이해관계자들이 식민지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철도 개통과 높은 수준의 행정 시스템 도입, 고등교육기관인 홍콩대학교 설립 등으로 홍콩은 빠르게 탈바꿈한다. 특히 영국 정부의 자유무역정책과 항만 및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는 홍콩이 국제 중개 무역항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무렵 아시아 각국이 개방되면서 홍콩은 중개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유럽으로의 면화 수출을 중단함에 따라 인도와 청나라에서 생산된 면화를 유럽으로 수출하는 출구가 되었다. 이뿐 아니라 인도 상인들이 홍콩의 금융업과 무역업에 투자를 하면서 경제적 부흥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더구나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문화까지 완벽히 흡수하며 홍콩은 ‘동양의 진주’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바라본 웨스트 가우롱 문화 지구
위기를 기회로, 침체를 성장 동력으로
홍콩의 산업화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 점령되고, 1946년 영국으로 되돌아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홍콩의 중개무역은 잠시 침체기를 겪었다. UN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교역 금지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오히려 홍콩이 수출 지향적 공업화를 추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 기간 제조업의 확대가 이뤄졌다. 특히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 국공내전이 계속되면서 상하이의 섬유산업 자본을 비롯한 많은 인구가 홍콩으로 유입되었다. 또한 중국 대륙에서 시작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노조의 설립과 활동을 억제하면서 홍콩이 자유방임 경제정책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했다. 중국 대륙에서 이주한 난민 의식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친족에 의존하게 되면서 홍콩은 노조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컸고, 이러한 상황은 결과적으로 홍콩이 자유방임주의 노선을 걷게 한 이유가 되었다.
한편, 196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은 교역 국가들에 대해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이었으나 1960년대 말 이후 간소한 규제제도와 유리한 조세제도 등에 힘입어 현재의 국제금융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금융 중심지 및 중국 투자를 위한 국제자금조달센터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2022년 3월 영국 런던시가 발표한 세계금융센터지수(GFCI, The Global Financial Centers Index)에 따르면 홍콩은 런던, 뉴욕에 이어 3위를 차지했으며,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국제금융공사(IFC)가 선정한 ‘비즈니스하기 좋은 곳’에서도 싱가포르와 뉴질랜드에 이어 3위에 올라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금융 허브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낮은 세율, 최소한의 규제, 법에 의한 지배, 금융 친화적 비즈니스 환경은 홍콩이 글로벌 금융 허브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홍콩 피크트램
전환의 국면 발 빠르게 포착하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홍콩의 경제 또한 석유파동 같은 세계적 경제침체와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부터 형성된 전자 및 의류 산업도 규모의 영세함과 기술의 취약함으로 한계에 직면했고, 산업구조의 전환을 꾀해야만 했다.
홍콩은 1970년대 후반부터 적극적 변화를 추진했다. 플라스틱, 섬유, 신발 등 기존의 수출 상품 비중을 줄이고 계산기와 컴퓨터 등 기술 집약형 상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1978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진행하면서 홍콩과 인접한 선전시와 광둥성, 푸젠성에 새로운 산업 단지를 조성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개방정책은 제조업의 위축을 불러왔는데 임금인상에 대한 부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쿼터량 제한 조치는 홍콩 제조업체들이 중국 대륙으로 공장을 이전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이 중국에 홍콩을 반환하면서 중국과 홍콩은 ‘한 국가, 두 체제’ 원칙에 따라 상호 간 다른 법체제와 금융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고, 다른 나라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많은 기회를 제공받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경제에서 더욱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대관람차
다시 보는 홍콩의 저력과 가능성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홍콩 반환 이후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반발로 자본과 기술 인력의 해외 유출 현상이 벌어졌다. 더구나 외환위기와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침체로 홍콩 제조업은 위축세를 이어가게 되었다. 최근에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긴장이 높아지면서 홍콩은 지금까지 유지해 온 세계적 금융과 무역 중심지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기도 하다.
중국과의 관계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홍콩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도 있다. 홍콩이 지금까지 세계적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한 건 다양한 요인이 결합해 만들어진 결과이다. 중국 내의 홍콩 국가보안법 도입 등으로 홍콩의 민주주의와 인권탄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홍콩은 금융과 무역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의 해법을 계속해서 모색해 나갈 것이다. 또한 홍콩이 가진 인프라와 인력 등 우수한 자원은 여전히 홍콩이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저력이자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몇 번의 위기와 위협 속에서도 도전과 혁신을 꾀한 홍콩의 사례는 세계 초일류도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인천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전한다. 인천이 시대와 세상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더욱 힘있게 적극적으로 발전의 추진력을 일으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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