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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무형문화재와 차 한잔 - 김국진 휘모리잡가 보유자
“우리 ‘소리’는 좋은 것이여~ K-팝의 원조거든”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안영우 포토 저널리스트
“육칠월 흐린 날 삿갓 쓰고 도롱이 입고 곰뱅이 물고 잠뱅이 입고, 낫 갈아 차고 큰 가래 메고 호미 들고~”
봄날, 겨우내 얼었던 시냇물이 녹아 흐르듯 그의 입에서 줄줄줄 창이 흘러나온다. 노래 흥은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손끝으로 이어지며 ‘촤-악’ 부채가 펴진다.
“어디야 낄낄 소 몰아가는 노랑 대가리 더벅머리 아희놈 게 좀 섰거라~” “얼쑤~”
‘휘모리잡가’(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0호) 보유자 김국진(72). ‘소리’를 시작한 지 55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관객들을 마주하면 가슴이 뛴다. 여기저기 쑤시다가도 무대에만 서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이유다.
“제가 열일곱 살 때 송현동 양키시장에서 기름걸레 배달일을 했어요. 그 시장에 국악원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소리(창)가 그렇게 듣기 좋은 겁니다. 어느 날 저도 모르게 국악원으로 들어갔지요.”
손에는 기름걸레를 든 채 불쑥 들어온 더벅머리 소년에게 당시 국악원 원장이던 이영열 선생은 “노래를 불러보라”고 한다. 김국진의 목청에 귀 기울이던 원장은 “앞으로 자주 오라”고 얘기한다. 그렇게 김국진은 ‘주경야창’을 하며 틈틈이 ‘경서도소리’를 배우기 시작, 10년 만에 제자들을 둘 정도로 일취월장한다. 30대에 접어들며 김국진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긴다.
“서울에 중요무형문화재 19호 ‘선소리산타령’을 하는 이창배, 정득만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목청이 카랑카랑하고 고음이 잘 나오는 김국진은 서울에서도 스승들의 사랑을 받았고, 국악제 같은 대형 공연이 열리면 중요한 역할을 척척 소화해내며 빠르게 성장한다. 그런 그가 1980년대 중반 인천에 국악의 씨를 퍼뜨려야겠다고 결심한 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경주 김씨 17대손입니다. 현 미추홀구청 자리가 조상님들이 터 잡고 살아온 땅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우리 전통음악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소명감 같은 게 올라왔어요.”
그렇게 전 재산을 쏟아 주안 시민회관에 ‘김국진 국악원’을 차린 그는 소리에 깊이 정진하는 한편 제자 양성에도 매진한다. 전주대사습놀이, 경기국악제 등 전국 대회에서 두각을 보였지만 그에겐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요원해만 보이는 ‘국악의 대중화’였다. 그러던 중 생각이 같은 동지를 만났으니, 한국예술경영협회 오영일 대표이사다.
“인천을 지키며 정말 좋은 공연을 많이 기획하고 무대에 올리는 젊은 분이었지요. 함께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국악을 시민들에게 친근한 예술 분야로 만들어나가자고 의기투합을 했습니다.”
김 보유자는 이후 오 대표와 함께 ‘춘향전’, ‘배 띄워라’, ‘최진사댁 잔칫날’ 같은 국악창작극을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려왔다.
“우리 소리에는 역사와 생활, 문화가 다 담겨 있습니다. 세계적인 K-팝,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도 다 우리 전통 소리에서 태동한 것입니다.”
(사)재인천광역시무형문화재총연합회 이사장이기도 한 김국진은 “전통예술을 하려는 젊은이가 많아지는 사회적 여건과 풍토가 마련됐으면 좋겠다”며 “우리 전통예술의 선산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국진 휘모리잡가 보유자가 장구를 치며 창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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