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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특집 : 고일상 관장
고일상 관장의 아버지를
닮아가는 시간
고일상 가족역사기록관 관장
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 사진. 김경수 포토디렉터
아빠를 닮아있네
바쁘게 살아온 당신의 젊음에
의미를 더해줄 아이가 생기고
그날에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
설레는 웃음은 빛바래 가지만
… 중략 …
외로운 어느 날 꺼내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있네
- 김진호 ‘가족사진’ 中
고 관장 아버지의 물건들로 가득한 박물관
가수 김진호가 부른 ‘가족사진’은 가슴으로 들어야 하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단지 사랑이나 그리움이란 말로는 다 풀어낼 수 없는 가족애가 노랫말과 선율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많은 아들들은 특히 ‘아빠를 닮아있네’라는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힌다.
가족사진을 보며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일까. ‘자기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의 태도, 가치관, 행동 등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가는 과정’. ‘동일시’의 정신분석학적 정의다.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서 ‘가족역사기록관’을 운영 중인 고일상(71) 관장은 이러한 정의에 가장 근접한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버린 아들이었다.
고 관장 아버지의 물건들로 가득한 박물관
아버지가 생전 사용하던 전축
술상으로 마주하는 아버지의 마음
각종 골동품으로 가득 찬 방. 100년이 넘은 오디오 장비와 영사기를 비롯해 반닫이, 도자기, 수표 발행기, 거울, 벼루, 각종 고서, 나무 화로, 미군 잠수함에서 사용한 전화기 등 없는 게 없다. 어림잡아 1천여 점은 돼 보였다. 경매로 내놓을 경우, 상당한 가격에 거래될 것으로 짐작되는 전시품도 상당수다. 모두 고 관장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한다. ‘보물 1호’가 궁금했다. 고 관장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을 꼽아달라 고 했다.
“바로 이것이 이곳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피드백이 왔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조그만 술상이 있었다. 이른바 ‘원픽’(One pick)치고는 소박하기 그지없다. 어느 시골집 부뚜막에 놓여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술상이다. 술상 위에는 술병과 술잔, 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술만 있다면 당장이라 도 대작이 가능한 디스플레이다.
“이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장남인 저하고 한잔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술상을 보면 ‘다른 형제에 비해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네가 나름대로 잘 살아줘서 참 좋다’라고 말씀하시며 잔을 건네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추억이 깃든 연과 전화기
술상은 아버지와 아들 간 쌍방향 소통의 창구였다. 이 술상이 비교적 넉넉한 공간을 차지하면서 별도의 단(壇) 위에 전시되는 등 특별대우(?)를 받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 관장은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한약방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고 관장이 고등학교를 마쳤을 무렵 가족들은 금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도 한약방을 운영했기에 가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다른 형제와 달리 고 관장은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대신 고 관장의 관심을 끈 것은 의상 디자인이었다. 이태원에서 무대의상전문의상실을 운영하며 송창식, 윤시내, 장현 등 많은 연예인의 의상을 디자인했고 부인도 그곳에서 만났다. 자리가 잡히자 더 큰 꿈을 꾸었다. 아르헨티나의 패션업계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 관장이 추구하는 디자인과 그곳의 패션 트렌드는 맞닿지 않았다.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6개월 만에 귀국해야 했다. 돌아와 보니 무대의상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어 있었다. 덩달아 패션사업도 접어야 했다. 이후 정착한 곳이 인천이다. 동구 송림동에 살던 처남의 집을 사들여 새로 3층 건물을 짓고 1층에 세탁소를 차렸다. 그때가 1990년, 고 관장이 30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다. 이후 고 관장은 본격적으로 봉사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새출발이었다.
“아버지는 다양한 분야에 재능이 많아, 수시로 관련 분야의 물품을 사들이거나 수집했어요. 그러면서도 늘 주변의 불우한 이웃을 돌보셨지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살 때는 아버지의 지시로 혼자 사는 노인 가정에 쌀과 라면,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생필품을 전달했어요. 3일에 한 번꼴, 하루에 다섯 가정 정도를 방문했는데 어머니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달동네 언덕을 오르기 일쑤였지요.”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에게 이런 일이 달갑지만은 않았을 터. 하지만 고 관장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인해 봉사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노인 가정을 방문했을 때, 문을 열기조차 싫었어요. 방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지요.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도 냄새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노인들과 정이 들어서인지 언제부턴가 그 냄새가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외로운 분들을 돕는다는 것에 보람도 느끼게 되고….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던 것 같아요.”
박물관에 비치된 영사기
고 관장의 아버지가 생전 사용하던 계산기
가진 게 없으면 몸으로라도 봉사해라
인천에 둥지를 틀면서 아버지가 그에게 심어준 씨앗은 본격적으로 발아했다.
노인무료석식봉사, 사랑의 집 고쳐주기 등 다양한 봉사활동의 현장에는 그가 있었다. 10년 넘게 독거노인이나 경제력이 없는 이웃 주민들에게 무료 이불 빨래 봉사를 해온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방송을 타기도 했다. 한번은 80대 할머니의 집을 수리하다 장판 밑과 싱크대 밑 등에서 현금과 수표 등 1,002만 원을 발견해 할머니에게 뜻밖의 돈벼락을 선사(?)하기도 했다. 아들이 준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아둔 사실을 할머니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고 관장의 부인 김금분 씨 또한 잠옷 1만 벌을 지어 이웃들에게 나눠 줄 정도로 봉사에 남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이러는 사이 고 관장에게는 새마을협의회장, 노인대학장, 민주평통 협의회장, 새마을금고 이사장, 노인봉사대협의회장 등 다양한 직함이 주어졌다. 그의 봉사 행보는 국민훈장을 받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가진 게 없으면 몸으로라도 봉사해라.”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고일상 씨
고일상 씨의 아버지인 고제창 씨의 생전 모습
고 관장이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얘기라고 한다. 고 관장이 동일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의 봉사 정신이었던 듯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9년이 흘렀다. 이제 아버지의 유지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해서였을까. 2년 전 그는 곳곳에 흩어져 보관 중이던 아버지의 유품을 한데 모아 ‘고일상가족역사기록관’을 꾸렸다. 그리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그 소박한 술상을 차려놓았다. 기록관이 문을 닫을 시간. 집으로 돌아가야 할 70대 아들이 잠시 머뭇거린다.
“오랜만에 아버지 얘기를 하다 보니 아버지가 많이 보고싶네요. 오늘은 여기에서 자고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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