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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인천으로 : 북도면 섬마을 집배원 이야기

2025-05-16 2025년 5월호

그가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머물렀다


스물세 해, 

섬을 건넌 

어느 집배원의 기록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스물세 해 동안, 그는 바다보다 깊고 푸른 마음을 건넜다. 신시모도 연륙교를 지나가는 이선희 집배원



바람이 분다. 

바다 물결이 흔들리고, 한 사람이 그 길을 건넌다. 작은 배 한 척이 선착장에 닿고, 

우편 단말기에 스며드는 짧은 숨결 하나. 우체통 앞, 늙은 고양이가 고개를 든다. 

눈동자에 새벽빛이 깃든다.

북도면의 아침은 그렇게 조용히 깨어난다.


북도우체국의 집배원, 이선희.

스물세 해,  그의 걸음은 바람을 타고

때로는 거센 물살을 넘었다.

육지와 섬, 섬과 섬 사이.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방향으로 그 길을 걸었다.

어깨에 멘 가방은 해마다 낡아지고, 손은 바닷바람에 마르고 갈라졌지만,


그가 전한 안부는 한 번도 길을 잃은 적 없었다.

먼저 도착한 건 편지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이었다.

“전 항상, 마음을 다해 전했어요. 편지 한 장일지라도.”

한순간 한순간,  누군가의 안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듯 건넸다.

기다리는 손은 따뜻했고, 마주한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눈빛엔 물기가 맺혔다.

기억을 안고 스쳐간 바람처럼, 그의 발자국은 조용히, 오래도록 사람들 마음속에 머물렀다.


마지막 우편배달을 앞둔 어느 날, 

평소보다 이른 시간, 마당에 나와 그를 기다리던 

아흔 셋의 김정순 할머니가 말을 건넸다.

“퇴직이라니, 벌써 그 나이가 된 거야?” 

잠시 머뭇대던 끝에 웃으며 말을 잇는다.

“스물세 해 전에도 예뻤어. 

지금도 여전히 예뻐. 마음이 곱고 다정해서… 늙지를 않아.” 


할머니의 주름진 눈엔, 

여전히 23년 전 그날의 햇살 같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남긴 발자국 위로 한 시절의 끝자락이 내려앉는다.

섬 길가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나고,

우체통은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을 기다리고 있다.


텅 빈 길 위도, 끝없는 갯벌 위도, 마음을 싣고 건넜다.


스물세 해 섬을 건너, 이제 마지막 길로 향한다.



길 위의 시간, 

눈밭 위를 걷는 마음 

눈이 허벅지까지 차오르던 날, 그는 아침빛이 채 번지기도 전에 우체국 문을 나섰다. 바람이 눈발을 몰아붙이고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무거운 우편 가방은 어깨를 툭툭 내려치고, 숨을 내쉴 때마다 얼어붙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속에 잠겼다. 눈 덮인 비탈길은 미끄럽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팔랐다. 그는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도 묵묵히 다시 일어섰다.

“오늘 같은 날은 안 와도 되는데….” 걱정 섞인 말이 눈발 속에 흩어졌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마치 눈보라도 하루의 일부인 듯이.

“편지는 약속이에요. 누군가 기다리는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요.”


말보다 마음이 먼저 울었다. 김정분 아주머니


멀어지는 길 위에서,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편지는 늘 정확히 전해져야 했다. 주소도, 시간도, 손에 쥔 감정까지. 폭우가 쏟아지는 날엔 신발 속까지 젖은 채 골목을 돌았고, 배가 뜨지 않던 날엔 선착장에 앉아 식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다. 날이 아무리 험하고 여정이 늦춰져도, 그는 늘 같은 시간, 같은 걸음으로 도착했다. 그의 발걸음은 단 한 번도 그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어느 날은 자녀의 합격 통지서가, 또 어떤 날은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할 연금 봉투가 그의 손에서 누군가의 품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단지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마음을 꾹 눌러 담은 기다림의 무게였다. 그는 우체통 앞에서 늘 한 박자 멈췄고 무심히 넣는 법이 없었다. 북도우체국의 집배원, 이선희. 사람들은 그를 ‘우체부’라 불렀지만, 실은 누군가의 삶의 순간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른 자리, 아버지의 봄날도 이곳에 머물렀다. 사진은 북도우체국의 2대 국장 조상천 님


북도우체국 사람들. 긴 세월 마음을 주고받은 이들이 마지막 봄을 함께했다. 시계 방향으로 이선희·조성환·황대연·박기조 주무관, 조형원 국장(가운데)



섬 우체국이라는 

이름의 풍경

바닷바람에 나무 문이 덜컹거릴 때면, 조형원 국장은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1980년대 연안부두에서 북도면까지 배로 네 시간이 넘게 걸리던 시절. 섬의 아침은 늘 우체국 문이 열리는 소리로 시작되곤 했다. 누렇게 바랜 장판 위, 아버지의 우편 가방에서 풍기던 종이 냄새. 밤마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던 교환원의 목소리. 기억 속 아버지는 한 손에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우체국 창문에 맺힌 성에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곤 했다. 

사람들의 삶을 품고 다니던 그 손엔, 차디찬 바닷바람이 스며들었다. 짠내와 추위에 붉게 튼 손끝을 매만지면서도, 아버지는 한 번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 손이 작아진 건, 암 때문이었다. 런던 유학 중이던 조형원 국장은 한 통의 전화에 모든 걸 접고 돌아왔다. 낯선 도시에서 꿈꾸던 삶은 그 자리에 멈췄지만, 병상에 앉은 아버지의 등을 조용히 쓸어내리던 그날, 그는 섬에 남기로 마음먹었다.


1965년 11월 10일, 북도우체국이 처음 문을 열었다. 조형원 국장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은 2021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곳의 세 번째 국장이 되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 아버지에게, 다시 그에게로 이어진 검은색 문진 하나가 놓여 있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 문진은 여전히 종이 한 장을 단단히 붙잡아준다. 그 안에는 말없이 축적된 세대의 시간이 묵직하게 깃들어 있다.

그는 집배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 2013년, 서른하나의 나이에 북도면으로 들어와 우편을 들고 섬 골목을 돌던 날들. 바람을 등지며 걷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안부를 전하던 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래서 그는 안다. 이선희 씨가 걸어온 스물세 해가 얼마나 단단하고도 고된 시간인지, 그 발걸음마다 어떤 마음이 담겨 있었는지를. “23년, 같은 길을 걸어왔다는 건…. 진심이 아니면 못 하는 일이에요. 저는 알아요. 저도 그 길을 걸어봤으니까요. 힘든 날도 있고, 벅찬 날도 있고… 그 모든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사람이에요, 그분은.”


편지는 누군가의 안부와 기억, 그리고 마음을 실어 나른다. 북도우체국은 그 마음들이 가장 먼저 닿아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다. 말보다 오래 남는 마음처럼, 이 작은 섬의 우체국은 오늘도 또 한 사람의 하루를 조용히 지켜내고 있다. 

그날 아침, 그는 평소처럼 우체국 문을 나섰다. 헬멧을 깊숙이 눌러쓰고, 어깨에 가방을 둘러멘 채 익숙한 손길로 브레이크를 풀었다. 핸들 너머로 보이는 섬 길. 수천 번 오갔던 풍경이지만, 그날만큼은 조금 더 천천히 더 오래 머물렀다.


마지막 봄, 마지막 편지. 마음을 담아 전하는 작은 안부

마음을 나누고, 온기를 건넨 시간. 웃음 속에 스며든 작별의 마음. 

가족처럼 함께한 이순녀, 김정순, 천은년 어르신과 함께




조용한 이별, 

이어지는 기억

편의점 앞, 김정분 아주머니가 문가에 서서 그를 맞았다. 평소처럼 반가운 인사 대신, 조용히 웃다가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오늘 같은 날은 하루쯤 미뤄도 되잖아요. 그래도 또 오시네, 꼭 오셔….”

그 말끝에 묻어 있는 숨은 짧았지만 깊었다. 긴 시간 쌓아온 고마움이었고, 말보다 먼저 북받친 울컥한 마음이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아주머니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선가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가 들려왔다. “이제는 본인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 그런 말들이 하루 종일 그의 뒤를 따랐다. 길모퉁이마다, 문 앞마다, 섬 사람들의 인사가 한 통의 편지처럼 그에게 건네졌다.


봄이 무르익었다. 섬의 북쪽 끝, 한때 매일같이 들르던 조정희 할머니 댁 앞에 서 그는 잠시 멈춰섰다. “들어와서 커피 한 잔 하고 가”라던 그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닫힌 문 너머, 유리창 안쪽으로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젠 도착할 편지도 대답할 손길도 없지만 그는 여느 날처럼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섬 사람들은 하나둘 떠났고 그가 기억하던 이름들도 점점 흐려져 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길 위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누군가의 안부가, 지나간 계절이, 그가 건넨 마음이 마을 어귀마다 아득히 흘러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 마지막 배달을 마친 그는 다시 오토바이에 올랐다. 뒤편으론 손을 흔드는 사람들, 말없이 눈을 맞추는 시선들이 그를 배웅했다. 5월이라지만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봄바람이 등을 살며시 밀어주듯 그는 속도를 올렸다. 다리 위, 그가 탄 오토바이가 점처럼 작아진다. 


벚꽃 흩날린 길 위에, 스물세 해의 안부가 머물렀다.



그날, 마음이 도착했습니다

당신에게도, 오늘 편지 한 통이 도착했을지 모릅니다.

혹시 그를 만났던 날이 기억나시나요?

추운 겨울 끝자락이었나요,

아니면 비가 소리 없이 내리던 봄날이었나요?


그가 건넨 작은 봉투 속엔,

주소보다도, 이름보다도 먼저, 마음이 적혀 있었습니다.

기쁨도 위로도 아닌, 말 없이 건네는 안부 하나.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그가 떠난 자리,

우체국은 여전히 온기를 품은 채 그 자리에 있습니다.

벽엔 그의 낡은 가방이 걸려 있고,

책상 위 우편 단말기는 침묵 속에 시간이 쌓여 갑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지금도,

어딘가, 누군가의 마음을 향해

작은 발자국처럼 조용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도,

오늘, 그런 편지 하나 도착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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