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계절, 그리고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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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사 주영진, 강화로 돌아오다 

그는 열여덟이었다.

봄이면 마당 가득 퍼지는 흙냄새를 좋아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타를 치며 햇살 속에 앉아 있곤 했다.

나무 그늘 아래선 하모니카를 조용히 불던 소년.

오래된 흑백사진 속 그 미소는

지금도 어딘가 바람처럼 머물러 있다.

그러던 1950년 8월의 어느 날,

그는 전주에서 남원까지 걸어가 군복을 입고 떠났다.

그날 이후, 그의 시간은 멈췄다.

남겨진 사람들만이 계절을 건너며 살아냈다.

어머니는 매달 도착하는 연금 봉투 앞에서 침묵 속에 울었고,

조카는 무너진 선산 가장자리에 국화 한 송이를 놓았다.

사진 한 장, 군번줄도 없이 사라진 이름,

기다려도 끝내 돌아오지 않을 날들.

그리고, 75년이 흐른 어느 봄날.

한 줌 햇살마저 숨죽이던 오후,

그는 다시, 강화로 돌아왔다.

소나무 그늘 아래

무너진 세월을 대신해 이름 하나가 말없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잠들어 있던 계절이 천천히, 다시 깨어났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경수 포토디렉터

고향 강화 땅, 잊힌 시간의 틈에 한 송이 봄이 피어났다.

고 주영진 일병의 조카, 주명식 씨. 그의 눈빛에 말없이 지나간 계절들이 머물러 있다.

주영진. 75년 만에 되찾은 이름. 침묵 속에서도 살아남은 기억의 조각

각

열여덟의 전장, 

너무 짧았던 여름

1950년 8월, 장맛비가 한차례 휩쓸고 간 여름이었다. 바람은 멎고, 눅눅한 열기가 후끈한 땅 위에 엉겨 붙어 있었다. 주영진은 전주에서 남원까지 걷고 또 걸었다. 발등은 부어오르고 땀에 절은 옷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숨이 목구멍 깊숙이 달라붙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뒤돌아서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나이였다. 입대한 지 하루 만에 군복을 입고 총을 받았다. 훈련은 없었다.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던 소년이었다. 강화 장화리 들판을 건너던 바람, 마당 가득 퍼지던 흙냄새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 여름, 그는 다른 이름을 택했다. ‘학도병’. 생의 끝보다 먼저 다가온 결심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갔다. ‘쾅, 쾅—’ 땅이 울리고 하늘이 갈라졌다. 낙동강 전선의 포화 한가운데, 그는 서 있었다. 기계와 안강 사이, 장대비에 젖은 산자락은 질퍽한 진창으로 변했고 포성이 사방을 가르며 쏟아졌다. 입대한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자욱한 연기 아래 고막을 때리는 폭음만이 허공을 헤맸다. 그날 이후로 누구도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함께 떠난 친구 다섯 중 셋만이 살아 돌아왔다. 열여덟이었다.

그의 전사 통지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야 집에 도착했다. 어디에 묻혔는지, 마지막이 어땠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가족에게 남겨진 건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여름뿐이었다. 어머니는 매달 도착하는 연금 봉투를 가슴에 안고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고, 조카 주명식 씨는 무너진 선산의 빈자리에 해마다 국화 한 송이를 놓았다. 그렇게 다시 오지 않을 시간과 놓지 못한 마음이 빈자리를 지켰다.

“인천상륙작전이 며칠만 빨랐더라면…, 삼촌은, 아직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슬프게 웃었다. 1950년, 한 소년의 여름은 그렇게 사라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계절처럼.

어머니는 매달 도착하는 연금 봉투를 가슴에 안고 울음을 삼켰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과 놓지 못한 마음이 빈자리를 지켰다.

오래된 가족 앨범을 펼쳐보는 주명식 씨. 

부르지 못한 이름, 지울 수 없는 얼굴. 기억은 언제나 곁에 머물렀다.

75년을 돌아, 마침내 손에 닿은 귀환의 징표

기억의 조각들

2000년 가을, 경북 경주시 안강읍. 볕조차 낮게 누운 붉은 들녘 아래, 깊이 잠들어 있던 시간이 천천히 몸을 뒤척였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층층이 쌓인 흙을 걷어내자, 침묵에 봉인돼 있던 땅이 마침내 한숨처럼 가라앉았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건 단단히 굳은 치아 몇 조각과 네 발의 탄피. 이어 부러진 어깨뼈와 갈비뼈가 조심스럽게 햇살 아래로 옮겨졌다. 그 순간,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진실 하나가 다시 세상 위로 떠올랐다.

군번줄은 없었다. 이름도, 계급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무명’이라는 이름으로 스무 해가 넘도록 세월 아래 묻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끝내 진실을 놓치지 않았다. 조각난 치아 하나, 바스러진 뼈 한 토막이 오랜 침묵을 깨우며,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냈다. 2024년 3월, DNA는 강화의 혈맥과 닿았고, 마침내 하나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주영진.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세 글자가, 마침내 숨결을 타고 시간의 저편에서 돌아왔다.

그날 아침을 조카 주명식 씨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가슴이 뛰더라고요. 전화를 받고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어요. 설마, 하면서도… 드디어. 마치, 삼촌이 아주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어요.”

목소리는 낮았고 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한참을 눈을 감은 채, 오래전 흑백사진 속 삼촌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했다. 하모니카를 목에 걸고 웃고 있던 청년. 이제는 낡은 종잇장 너머, 기억 속에서만 그려지는 얼굴이었다.

“이제야, 75년을 돌아 고향에 오셨어요.”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며 선산 곁에 놓인 국화한 송이를 고요히 흔든다. 잊고 있던 계절이, 그렇게 아주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야, 75년을 돌아 고향에 오셨어요.”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며 선산 곁에 놓인 국화 한 송이를 고요히 흔든다.

잊고 있던 계절이, 그렇게 아주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손에 쥔 국화 한 다발, 가슴에 내려앉은 세월. 기다림의 계절이 초록 들판 위로 번져간다.

잊힌 시간 위에 피어난 노란 숨결, 오래된 기다림이 잠든 자리

 다시, 그 자리에

2024년 4월 15일, 강화 장화리. 들판에는 어느새 연둣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호국의 영웅 귀환’의 날. 소년이 떠난 지 75년, 이름 없는 계절이 고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해가 담긴 하얀 함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간절히 기다려 온 마음은 먼저 들녘에 닿았다.

불어오는 바람도 오래전 약속을 기억하는 듯했다.

“고향으로, 고향에 잘 오셨어요. 돌아가셨을지라도….” 

선산 언저리에서 누군가 조용히 속삭인다. 일흔다섯의 마을 어르신 나애란 씨였다. 그날 아침, 자꾸만 가슴이 저려 손에 쥔 일을 내려놓고는 망설임 없이 달려왔다고 했다. 새하얀 국화 꽃잎들이 푸른 풀잎 사이로 가만히 몸을 기댄다. 곁에 있던 조카 주명식 씨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포성이 사라진 낯선 산자락 어딘가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 간사람. 그 존재를 되찾기까지, 75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 세대가 묻히고 또 다른 세대가태어났다. 주영진. 그 이름은 한 번도 소리 내어 불리지 않았지만, 단 한 순간도 잊힌 적 없다.

지금까지 발굴된 국군 전사자의 유해는 1만 1천 400여 구. 그 가운데 신원이 확인되어 가족 품으로 돌아간 이는 251명뿐이다. 여전히 많은 생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차디찬 땅속 깊이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날, 강화 장화리의 들판은 달랐다. 생이 너무 짧았던 열여덟의 병사. 잃어버린 여름을 건너, 아무도 닿지 못했던 시간을 지나,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웠던 햇살 한 조각, 흙 한 줌이 비로소 그의 곁에 머물렀다. 바람은 잠시 숨을 죽이고 장화리의 하늘은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