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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칼럼
인천우체국 100년과 빨간 우체통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옛 인천우체국 앞 빨간 우체통
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 ‘국군장병 아저씨’ 앞으로 편지를 보내곤 했다. 학교에서 단체로 보내는 위문편지였다. 중학교 때는 교생실습을 다녀간 대학생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체벌로 교육하던 선생님들과 달리 교생들은 형처럼 친근했고, 누나처럼 따뜻했다. 우표도 새벽잠을 설치며 어렵게 사서 간직하고 있던 기념우표를 붙였다. ‘우표 모으기’가 유행처럼 번져 있던 시기였다.
대학생이 되어선 짝사랑의 편지를 끄적거렸다. SNS나 이메일, 휴대폰이 나오기 전, 한참 동안 줄 서서 기다리다 1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넣고 3분 정도 통화할 수 있는 공중전화가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마다 기도를 올렸다. 편지를 보내고 나면 며칠 동안은 아침저녁으로 집 앞 우편함을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답장을 받아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빨간 우체통과 우편함은 가슴 뛰는 설렘이고 연둣빛 이파리 같은 소망이었다.
옛 ‘인천우체국’(중구 항동6가 1)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1990년대 초중반이다. 등기나 소포를 부치기 위해 회사에서 가까운 인천우체국을 이용했는데, 파르테논 신전 분위기의 외양과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 양식의 원형 기둥과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해 지은 건물이 인천우체국이었던 것이다. 인천우체국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때가 1923년 12월 10일이니 100년이 흘렀다.
우리나라에서 서신을 주고받는 근대적 우편제도가 처음 시작된 해는 1884년이다. 그해 11월 17일 서울에 우정총국이 문을 열었고, 인천엔 분국이 설치됐다. 월남 이상재가 인천분국장에 임명되고, 최초의 우표인 문위文位도 발행한다. 그러나 12월 4일 우정총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한 달도 못 돼 문을 닫고 만다.
우편 행정을 재개한 건 11년 뒤인 1895년이다. 서울에는 한성우체사를 설치하고, 인천엔 경동에 있던 이운사 利運社 안에 인천우체사를 두었는데 제물포항 일대와 인천 읍내가 관할 지역이었다. 우편 업무는 인천과 서울에서 각각 출발한 우체부가 하루 한 번 오전 9시 오류동에서 만나 서신이 담긴 우체낭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와는 별개로 인천영사관 안에서 ‘인천우편국’을 운영하던 일제는 을사늑약을 획책하던 1905년 5월 인천우체사를 포함한 여러 개의 우체소를 인천우편국에 흡수·통합해 버린다. 이후 인천에 사는 일본인과 서울로 가는 우편물이 크게 늘면서 지금의 항동6가 자리에 새로운 청사를 준공한다. 인천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꾼 때는 광복 이후인 1949년 8월이다.
한국전쟁 때 건물 일부가 파손되면서 1957년 복구 공사를 하기도 했지만 인천우체국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다. 이후에도 줄곧 인천의 중심 우체국으로 시민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인천우체국이 2005년 연수구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엔 인천중동우체국이 들어온다. 그러나 건물 개보수가 필요하고 문화재 훼손이 우려된다는 지적에 따라 2019년 5월 사용을 중단한다.
한 세기를 흘러온 2023년 3월 중순. 인천우체국은 여전히 고풍스럽고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우체국 앞 빨간 우체통이 봄 햇살을 받으며 오롯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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