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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인천예술전당’의 탄생

2022-03-02 2022년 3월호


‘인천예술전당’의 탄생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현 인천문화예술회관)이 1994년 4월 8일 개관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천시민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 예술문화공간은 주안의 ‘인천시민회관’이었다. 1974년 건립한 객석 1,350석의 대강당을 포함해 2,0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시민회관에선 오케스트라, 합창, 한국무용, 연극과 같은 예술 창작물이 무대를 달궜고 시상식, 경진대회 등도 열렸다. ‘인천일보’와 한국문인협회 인천시지부가 1993년 주최한 ‘인천도서 100년전’ 행사 땐 수십만 명이 참관하며 전국적 인지도가 한껏 올라가기도 했다. 주요 공연·전시의 무대가 인천문화예술회관으로 이동하면서 시민회관 시대는 2000년 막을 내린다. 그 자리에 ‘틈 문화창작지대’가 둥지를 틀었고, 건물 앞광장은 정자나무 그늘과 분수가 솟아나는 쉼터로 시민들을 맞는 중이다.
개항 이후 인천의 첫 공공 예술문화공간은 ‘인천공회당’(1923)이다. 지금의 인성여고 체육관 자리에 있던 공회당은 붉은 벽돌 2층 건물로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선 꽤 큰 극장이었다. 1920, 1930년대 공회당에선 현제명 초청 독창회, 제물포 하모니카 밴드 연주회, 인천고려체육회 주최 음악 무도회, 인천소년연합회의 어린이날 축하 동화회 같은 공연·행사가 펼쳐졌다. 한국전쟁 때 포격을 받아 무너졌던 공회당이 미군들의 복구공사를 거쳐 1,220석의 객석을 갖춘 ‘인천제1시민관’이란 이름으로 부활한 때는 1957년이다. 이후 영화를 주로 상영했는데 간간이 ‘서영춘 ·백금녀의 폭소가요 코미디 쇼’나 국경일 기념식 같은 행사가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1966년 6월 1일엔 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기념 연주곡 ‘인천시민 행진곡’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족한 문화적 갈증은 문화원과 공보관, 그리고 다방이 채워주었다. 중구 중앙동 4가 경기도병사부사령부(경기병무청) 건물 1층에 있던 ‘인천문화원’(혹은 한미문화원)에선 김찬삼 씨가 세계여행기를 강연했으며, 사동에 자리한 ‘공보관’(현 월디어린이집)에선 백일장 시상식, 시화전, 우표전시회 같은 이벤트가 진행됐다. 부평깡시장 안엔 제2공보관인 ‘북구공보관’이 있었는데 공연과 강연은 물론 농산물전시회, 결혼식까지 치른 부평 지역의 종합문화예술생활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북구공보관 자리였던 부평구 시장로 61번길엔 2004년 부평시장 공영주차장이 들어섰다. 다방은 1970, 1980년대 가난한 작가들의 아지트이자 갤러리였다. 다방에선 빵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입에 문 사람들이 인생의 덧없음과 예술의 영원성을 논하며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음악 다방, 여성 전용 다방, 심야 다방, 화랑 다방 등 형태도 다채로웠다. 중구 신포동 ‘은성다방’은 그 시절 기자이면서 문인, 화가, 사진가들이 즐겨 모이던 대표적 화랑 다방이었다. 1969년 은성다방에선 박응창, 윤갑로, 김영건, 우문국, 이경성 등 50대 미술인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오소회五素會’ 창립전이 개최된 이래 동정 박세림, 검여 유희강과 같은 인천 미술거장들의 전시회가 자주 열렸다.
인천공회당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인천문화예술회관이 개관 28년 만에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2024년이면 인천시민들은 좋은 음향과 세련된 무대시설, 편안한 객석을 갖춘 공간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아트센터, 부평아트센터와 함께 인천이 자랑하는 ‘예술전당의 탄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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