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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도 단단히 박힌 '바다의 옹이'

2012-04-05 2012년 4월호

아름다운 사람 | 도선사 배순태

 

깊고도 단단히 박힌 ‘바다의 옹이’


글. 정경숙_본지편집위원   사진. 김보섭_자유사진가

 

 

아흔에 가까운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영락없는 바다사나이다. 귀는 간혹 작은 소리를 놓쳐버리지만 한때 바다를 호령했을 목소리는 아직도 호기롭고 걸걸하다. 또 지팡이를 짚어야 걸음이 편하지만 큰 풍채에서 나오는 위엄은 세월도 어찌할 수 없다. 배순태(87). 그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를 마시고, 바다에서 살다, 바다로 돌아갈 바다 사나이다.
도선사(導船士)는 선박을 안전하게 항으로 입·출항시키는 마도로스의 꽃, 선장 중의 선장이다. 배순태 옹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 유항렬을 잇는 바다의 파일럿으로, 34년간 외길 인생을 걸으며 우리나라와 인천 항만의 발전을 이끌었다. 현재도 화수부두에서 선박회사 ‘홍해’를 운영하며 바다와의 인연을 놓지 않고 있다.
과연 정해진 운명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의 생은 바다를 품은 경남 창원에서 시작됐다. “왜정 말기였던 그때는 다들 못 먹고 못 살았지. ‘바다에서 태어났으니 바다에서 먹고 살자’ 싶어 무작정 배를 탔어. 지금도 여전히 바다에 있으니, 나하고 물하고 인연이 깊어.”
그는 진해상선학교와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거쳐 해방직전 갑종(원양외항선박) 2등 항해사 자격증을 따고 곧 갑종 선장면허를 취득했다. 키를 잡은 때가 스물아홉이던 1954년, 당시 우리나라 최대규모인 7천톤급 외항선에 태극기를 펄럭이며 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을 누비고 다녔다. “내가 조그마할 때 영국 가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은 묵은 먼지 속 세월의 곱절만큼이나 빛  바랬지만, 그 안에서 꿈을 이룬 채 활짝 웃는 젊은 청년에게선 빛이 났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다시 시작됐다. 그는 5년 후인 58년 도선사면허를 취득해 일년 후 인천항에 정착했다. 당시에도 도선사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업이었다. 늘 도전하며 살아야 직성이 풀렸던 그는, 간만의 차가 커 배들이 드나들기가 까다로운 인천항을 택했다.
도선사를 흔히 인간등대라고 한다. 아무리 노련한 선장이라도 도선사의 조언과 지시 없이는 배를 입·출항시키기 어렵다. 그는 지난 76년 밀 5만4천여 톤을 싣고 대기하고 있던 5만톤급 대형선박을 입항시켜 당시 밀가루 파동을 가라앉혔다. 다른 도선사들은 당초 이 대형선박이 인천항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도선을 거부했었다. 지난 86년 평택항에 국내 최초의 LNG 인수기지가 완공돼 10만톤급 선박이 입항할 때는 이 선박의 처녀도선을 맡았다. 88서울올림픽 때는 동구권 선수단과 임원을 태운 소련선박을 도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많은 업적 중에서도 노장의 기억 속 가장 선명한 일은 우리나라 도선의 앞날을 연 것이다.
“74년, 5천톤급 이상 대형선박이 댈 수 있도록 현재의 인천 독이 확장, 개량됐지. 그때 정부가 외국도선사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걸, 당시 전국도선사협회회장이던 내가 앞장서서 반대했어.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야.”
해신, 인간등대, 해옹이라 불리는 사람. 그의 고향은 바다며 그가 잠들 곳도 바다다. 썰물과 밀물이 눈 앞에서 훤히 드나드는, 그렇기에 자신을 더욱 필요로 했던, 바로 인천의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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