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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란 아들 딸에 늘 고마움”
“잘 자란 아들 딸에 늘 고마움”
글. 이용남_본지편집위원 사진. 김보섭_자유사진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어 전쟁통에 부모를 잃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보살피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과 길을 열어 준 이가 있다. 40여 년을 전쟁고아나 혼혈아들을 보살피는 데 헌신한 서재송(83, 비오) 옹.
그는 전쟁고아와 혼혈아들과 인천에서 40여 년의 인생을 함께했다. 그가 평생을 고아들의 삶을 열어주게 된 것은 연평도에 부임한 메리놀외방전교회의 최분도(Bebedict A. Zweber. 미국)신부를 만나면서였다. 최 신부는 전쟁으로 힘든시기, 고아들을 돕는 파트너로 서재송 할아버지를 선택했다. 그도 신부의 좋은 뜻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엔 덕적도 섬에 있는 고아들과 다른 곳의 아이들을 받아 16~30명씩 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방이 모자라 한방에 10명씩 자면서 매일 전쟁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쌀과 학비는 최신부와 후원자들이 도움을 줬지만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돌보는 것은 온전히 서 할아버지와 그의 부인 인현애(81, 크리스티나) 할머니 몫이었다. 인 할머니는 남편을 따라 인천 송현동성당, 부평3동본당 등을 옮겨 다니면서 아이들을 돌보느라 손이 마를날이 없었다.
“힘들고, 혼란스럽던 시기였어요. 어려운 시기에 부모도, 국가도 돌보지 않던 고아들을 챙겼지만 이 일이 언젠가는 중단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했어요.”
서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 미국이나 캐나다로 입양을 보냈다. 당시 한국은 이 아이들에게 교육은 고사하고 먹고 입히는 것도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는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입양요청이 오면 양부모의 학력, 인격, 능력 등을 철저히 알아본 후 서류를 꾸몄다. 아이들이 떠나기 전날엔 케익에 불을 켜고 파티를 열며, ‘나의 살던 고향’ 노래를 다함께 불렀다. 몇 년씩 함께 밥먹고, 생활한 제 자식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을 비행기에 태울 때면 매번 공항에서 눈물을 쏟았다. 비행기를 안 타겠다고 울며 버티는 아이들의 등을 떠미는 심정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서 할아버지는 큰 아이와 혼혈아 입양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간난아이나 영아들에 비해 큰아이와 혼혈아의 입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혼혈아들은 부모의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방치되는 경우가 많아 더 많은 애를 먹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미국가서 잘 컸어요. 한국에 있을 때 그렇게 속 썩이던 녀석들이 마음 잡고 다들 잘 컸어요.”
서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좋은 양부모 밑에서 잘 크고 있는지 보기 위해 미주지역을 여러번 방문했다. 미국을 방문하면 자식들이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싸움아닌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서 할아버지는 97년 이후론 입양일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일일이 손으로 쓴 아이들의 인적사항, 특징을 기록한 입양기록부 10여 권을 전산화해 혹 아이들이 친부모를 찾거나 뿌리를 알고 싶을 때 활용할 수 있도록 자료로 남겨 둘 계획이다. 또 친부모가 그리워 부모를 찾고자 연락하는 아이들의 부모를 찾아주는 데 남은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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