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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황톳빛 언덕과 천년고도를 품다

2012-07-31 2012년 8월호


아라비아 황톳빛 언덕과 천년고도를 품다


요르단(Jordan)은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다. 동쪽 끝에 있는 우리나라와는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 곳에 있다. 아직 직항기가 없어서 아랍에미리트로 가서 한 번 더 비행기를 갈아타야 갈 수 있다. 그 옛날 낙타타고 실크로드를 거쳐 갈 수 있었던 길을 이제 비행기로 황해~장강~천산산맥~고비사막 등 바다 건너 산 넘고 강을 지나서 족히 15시간은 걸려야 만날 수 있다. 요르단은 멀지만 성경에 자주 나오는 ‘요(르)단강’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다. 지구 반 바퀴는 돌아야 닿을 수 있는 두 나라가 국교 수립을 맺은 지 올해 꼭 50년 되는 해다.

글. 유동현_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_포토저널리스트

 


그리스ㆍ로마 보다 더 그리스ㆍ로마적
아라비아 반도의 작은 왕국 요르단은 옛부터 카라반들의 교역로였다. 홍해에 접한 아카바항에서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잇는 전통적인 대상들의 교역로였던 ‘King’s road’에 위치하고 있어 이집트·시리아·그리스·페르시아·비잔틴·이슬람 등 찬란했던 고대 문명들의 자양분을 흡수했다.
요르단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먹여 살린다. 전체 산업의 50%를 관광산업이 차지할 만큼 관광은 요르단의 주요 산업이다. 요르단에는 80만개 유적지가 있어 그야말로 ‘열린 박물관(Open Museum)’이란 칭호가 딱 들어맞는다. 무엇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문화가 공존한다. 이스라엘 다음으로 성경 지명이 많고 출애굽 당시 광야 생활 40년 중 38년을 보낸 곳이며,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은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고대 도시다. 기원전 1천200년께 암몬족의 수도였던 암몬 성터(Citadel)에는 헤롯대왕이 헤라클레스에게 바친 거대한 신전과 비잔틴 양식의 정문, 그리고 교회의 잔해와 물 저장고, 성곽 등이 남아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가슴 벅찬 그리스·로마 양식의 유적들이지만 그곳 주민들에게는 해질녘 한가하게 엉덩이 걸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돌덩이일 뿐이다. 요르단에는 그리스·로마보다 오히려 그리스·로마 유적이 더 온전히 남아 있다는 평을 받을 만큼 흔하다. 해발 850m의 언덕에 자리 잡은 성터 주위에는 온통 황토색 혹은 회색빛을 띠는 사각형 집들이 사방에 빼곡하다. 그 빛깔은 정부에서 일률적으로 규제한 듯한데 문득 사막을 달리는 낙타의 색깔과 흡사하다. 
암만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제라쉬는 정복자 알렉산더에 의해 처음 건설된 도시다. 4세기 이후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7세기 경 이슬람 제국에 정복되어 이슬람 문화가 덧입혀졌다. 개선문과 5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둥그런 광장, 5천석 규모의 로마식극장, 대열주 도로, 제우스·아르테미스신전, 비잔틴교회 유적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1천개의 기둥도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아르테미스신전으로 가는 길에는 화려한 코린트식 기둥들이 마치 로마병정들이 사열하듯 줄지어 세워져 있다. 그 길을 걷다보면 사막도 잊고, 협곡도 잊고 어느덧 로마시대의 원로원이 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지게도 된다. 이 모든 영화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느낀다.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약 250㎞ 길이의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요르단의 현대사는 거의 이스라엘과 애증의 관계로 흘러왔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수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국경선도 몇 차례 다시 그어졌으며 현재 600만명 전체 인구 중 절반가량은 전쟁을 피해 요르단으로 이주해 정착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암만 북쪽 110㎞에 위치한 움 카이스는 국경도시다. 요르단, 이스라엘, 시리아 세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가다라 지방으로 예수가 귀신 들린 병자를 살리기 위해 2천마리의 돼지를 몰살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현무암으로 만든 검은색 돌기둥과 비교적 원래 모습이 잘 보존된 원형극장 등 비잔틴 시대 전후의 유적이 남아 있다. 움 카이스의 언덕에 서면 골란고원과 갈릴리 호수, 그리고 이스라엘의 휴양도시인 티베리아가 한눈에 펼쳐진다.

 

 페트라-알 카즈나  

  

끝내 신비의 베일 벗지 않는 페트라
요르단에서 딱 한 곳만 들르라고 하면 관광객의 대부분은 2천400여 년 전 건설된 세계 7대 불가사의 고대 도시 페트라를 꼽는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에서 성배를 찾아 나섰던 고고학자 부자가 무너지는 신전을 빠져나오는 장면이 촬영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기원전 300년 전 아랍계 유목민 나바티안족이 건설한 페트라는 교역로의 중심지였지만 대상무역이 쇠하고 수차례 외침과 지진으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800년대 초 스위스 고대유적 탐험가 요한 루트비히는 현지인에게서 솔깃한 정보를 얻고 선지자 아론의 무덤에 제물로 바치러 간다는 이유를 대고 염소 한 마리를 끌고 갔다. 1812년 8월, 그는 마침내 금지된 땅에 ‘잠입’했다. 천년 고도 ‘페트라’가 다시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다. 바로 그 ‘발견’이 올해 딱 200주년이 되는 해다.
페트라의 보물 중의 보물은 알 카즈나. 이에 도달하려면 깎아지른 듯한 협곡 시크(siq)를 수없이 지나야 한다. 100m 넘는 높이의 암벽 사이로 난 협곡은 침식 작용과 대홍수로 생겨난 지형으로 살아있는 지질학 교과서이자 살아 있는 조각품 전시장이다. 수천 년의 시공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다보면 일순간 협곡 틈새로 햇빛을 받아 연분홍빛이 된 알 카즈나가 그 모습을 살짝 보인다. 마치 차도르를 걸친 베두인족 여인의 홍조 띤 얼굴처럼…. 신전이나 왕릉으로 추정되는 알 카즈나는 6개의 원형 기둥이 받치는 2층 구조의 건축물로, 붉은 사암 암벽의 안을 파서 만들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좁은 협곡을 따라 50m쯤 내려가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바위로 만든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걸어서 족히 두 시간은 걸리는 황톳길 투어에는 원형극장, 바위 무덤, 교회와 집 등 시간을 품은 폐허를 끝없이 만난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지는 700여 곳.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적이 얼마나 되는 지 가늠조차 힘들다. 페트라는 신비의 베일을 끝내 벗지 않고 영원히 불가사의로 남지 않을까.

 

황톳빛 사막 와디럼

 

태초의 땅, 사막과 광야
요르단은 사막과 광야의 나라다. 도시에서 자동차로 10분만 벗어나도 온통 황무지다. 대표적인 사막은 남서부에 위치한 와디 럼. 영겁의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붉은 암석들과 모래언덕이 장관을 이룬다. 모래라곤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우리로서는 그곳에 가면 ‘태초’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처음’을 체험케 하는 태곳적 상태로 잠시 멍 해진다. 마치 외계에 와있는 듯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몰려온다. 인간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 하나님의 땅. 그 광활한 비어 있음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며 인간은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다는 겸손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곳에서는 달리는 곳이 길이요, 오르는 곳이 정상이다. 바람만이 길을 내 준다.
가장 요르단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와디 럼에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실존 인물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영국 군인이던 그는 연고도 없는 아랍 지역의 독립을 위해 1917년 이 거친 사막을 가로질렀다.
요르단에서 가장 의미있는 기독교 유적은 해발 835m의 느보산(Nebo)이다. 요르단 계곡과 사해, 여리고, 요르단강(요단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느보산은 120세의 모세가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이곳에서 죽어 장사지내졌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인근 마다바시의 세인트조지 교회 바닥에는 AD 560년께 만든 세계 최고 최대(25m×5m)의 모자이크 지도가 있다. 약 200만개의 천연돌로 만들어진 이 지도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이집트 나일강 부터 터키까지 담고 있어 성서지리학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요르단 유일의 항구도시 아카바

 

석유와 맞바꾼 항구
요르단에도 사해(死海)가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해저 400m 지점에 위치한 소금바다다. 이 사해를 가운데 선을 그어 이스라엘과 반반씩 갖고 있다. 이곳에 몸을 담그면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구명조끼 없이 저절로 몸이 둥둥 뜨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사해는 보통 바다보다 약 5~6배 더 높은 염도를 함유해 어떠한 생물도 살지 못하지만 각종 유기물이 들어 있어 피부병이나 류머티스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요르단인은 이 사해에 와서 수영하고 머드팩하는 것을 호사로 삼는다. 사해는 매년 1m씩 줄어 400년 뒤 완전 마를 것으로 예상돼 그 호사도 후손들은 누리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한때 요르단은 바다를 갖고 있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사막에 막힌 내륙국가였다. 숨이 막혔다. 그들은 석유가 매장된 광대한 땅을 아라비아반도 남쪽 끝 홍해와 연결된 사우디 해안과 맞바꿨다. 20 여㎞의 해안을 얻기 위해 산유국의 지위를 잃은 것이다. 그 해안도시가 바로 아카바항이다. 그곳은 요르단의 숨통이다. 수출입되는 많은 화물이 그곳으로 통한다. 광활한 광야와 암석 계곡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마치 태평양이나 지중해 리조트 어딘가에 온 것 같이 사계절 마린 스포츠가 성행하고 오성급 호텔들이 해안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불현듯 도처가 바다인 우리네 삶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요르단의 정식 국명은 요르단하삼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으로, 아라비아반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9만㎢로 남한보다 조금 작고 그나마 전체의 90% 이상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사막이다. 인구는 약 620만 (2008년 현재)로 종족 구성은 아랍인이 98%, 아르메니아인이 1%, 체르케스인이 1% 등이다.
이 나라는 1세기부터 6세기까지 기독교문화권에 속하였으나 636년 이후 사라센제국의 판도에 편입됐다. 11세기 100년간은 십자군의 지배로 다시 기독교문화권에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슬람에 속해 있다.
우리나라와는 1962년 7월 26일 외교관계를 맺었다. 요르단은 국산 중고차 1위 수입국이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 물량(약 30만대)의 30%를 웃돌고 있다.

 

※ 포토저널리스트 김성환의 요르단 사진전이 10월 초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요르단
 레스토랑 ‘아라베스크’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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