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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가라, 이 바다에서 함께 놀자
이데올로기는 가라,
이 바다에서 함께 놀자
서해 혹은 황해는 대한민국과 중국이 나눠 가진 바다다.
가운데 보이지 않는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오랜 시간 이 바다는 어업, 무역, 페리 그리고 전쟁의 바다였다.
한국과 중국이 서로 손을 잡은 지 20년 되는 해, 이 바다에 ‘요트’가 떴다.
서해(황해)가 레저의 바다가 된 것이다.
글. 유동현_본지 편집장 사진. 홍승훈_자유사진가

어느 시절… 바다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어부들은 그저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를 잡아 오면 되었다. 더 잡고 싶은 마음에 조금 먼 바다로 나갔다. 쪽배는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큰 파도가 사방에서 덮쳤다. 일엽편주(一葉片舟). 몇 날 밤 사투를 벌였다. 겨우 낯선 땅에 다다랐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적대감을 갖기 보다는 오히려 맛있는 음식을 주며 극진히 환대했다.
다른 시절… 바다 쪽에서 요란한 꽹가리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저 멀리 바다 건너 사는 사람들이 생전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을 배에 싣고 포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그걸 주는 대신에 짐승가죽이나 쌀을 원했다. 그런데 이번엔 16세 정도의 처녀 한 명도 필요하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에 용왕님께 바칠거, 라고 한다.
또 다른 시절… 오랜만에 꽃게 떼가 바다에 나타났다. 풍어가를 부르며 수십 척의 배가 바다로 나갔다. 노총각 칠성이는 내년 봄엔 기어이 장가를 가겠다고 그 누구 보다 열심히 그물질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평선 저 너머에 검은 배들이 보였다. 중국배였다. 서로 꽃게 떼를 쫓던 양쪽 배들이 충돌했다. 난투극이 벌어졌다. 낫과 곡괭이들이 눈앞에 왔다갔다했다. 순간 칠성이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순간 바다는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11일… 송도국제도시 인천대학교 뒤편 바다에 멋진 자태를 뽐내는 요트들이 하나둘 모였다. 해마루호, 써니호, 밴드포호, 아이린호, 아이비호, 엘레나호 등. 본격적인 물살 헤치기에 앞서 내해경기(인쇼어 레이스)로 워밍업을 한다. 대회 운영선인 ‘코리아나’호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스를 펼칠 요트들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오후 3시 26분. 코리아나호에서 ‘뿌’하는 경적소리가 울려 퍼지자 요트들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1천300㎞ 황해 대장정 물살이 막 갈라졌다.
황해국제요트대회는 인천을 출발해 중국 웨이하이와 칭다오를 거쳐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는 6일간 1천300여㎞ 를 항해하는 ‘대장정’이었다. 동북아시아 한·중·일·러 4개국 소속 요트 선수들요트 30척과 선수 240여 명이 대회에 참가한다. 이 평화와 우정을 싣고 황해를 건넜다. 황해에서 최초로 펼쳐진 대륙간 횡단 국제요트경기였다.
경기 장소는 3구간으로 나뉘었다. 8월 11일부터는 1구간 인천~웨이하이의 390㎞에 달하는 바다 위에서 42시간 동안 경기가 펼쳐졌다. 2구간 경기는 15일부터 17일까지 웨이하이~칭다오 360㎞에서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22일 시작된 칭다오~인천 3구간 경기는 60시간 동안 548㎞의 바다를 가르고 막을 내렸다.
크루들은 조를 짜서 돌아가며 2시간씩 쪽잠을 자면서 바다를 헤쳐 나갔다. 바다에는 피할 곳이 없다. 풍랑을 만나고 때로는 폭풍우와 맞닥뜨리면 그걸 이겨내야 한다. 그들에게 요트는 유람이 아니다, 생존이다. 바람과 한판 싸움을 벌이는 극한의 경쟁이다.
요트는 오직 바람으로 간다. 바람은 순풍일 수도 있고 돌풍일 수도 있다. 마치 역사 속의 한국과 중국의 애증 관계와 같다. 1200여 년 전 신라의 장보고가 노를 저어 나아갔던 그 바다를 동북아의 젊은이들이 돛 하나에 의지하고 건넜다. ‘동북아의 지중해’ 서해가 진정한 ‘평화의 바다’가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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