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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과 함께한 70여 년 깊은 맛
서민과 함께한
70여 년 깊은 맛
개항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광복, 6 25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인천은 팔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와 사는 곳이 되어 버린 까닭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자기 고향 지명을 옥호로 붙인 경우가 아주 많다. 땅에 얽히지 않고는 삶을 말할 수 없는 한국인의 본성, 지연(地緣)의 작용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또 여기 저기 흩어진 동향 사람들이 쉽게 찾아오도록 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을 것이다. 6 25전쟁 이후 그 같은 경향이 훨씬 두드러져 보이는 데 북쪽에 고향을 둔 이들의 점포가 특히 그랬다.
글. 김윤식_시인 사진. 김보섭_자유사진가
평양옥 해장국
뚝배기에 찬밥 말아먹으면 끼니로도 든든
모르긴 해도 ‘평양옥(平壤屋)’ 상호도 그렇게 붙었을 것이다. 개업주 김석하씨는 1980년에 작고했고, 2대 업주인 그의 둘째 자제 동성씨마저 지난 2004년에 타계했으니 상호 작명의 더 자세한 내력은 3대, 손자 명천씨도 알 수 없는 채, 이렇게 “…… 붙었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평양옥은 1945년 평양 순안 출신인 김석하씨 부부가 중구 신흥동 3가 18번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개업한 장국밥집이 그 기원이다. 그는 일제 때 만주에서 신발 공장을 경영했었는 데,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인들이 등쌀을 대 빈털털이로 귀국, 어찌어찌 인천으로 오게 되었고, 당시 인천우체국 직원으로 있던 처가 쪽 식구가 이 자리에 방 하나짜리 집을 내주어 그것이 오늘의 이런 큰 건물의 터전이 된 것이다.
외지에서 갓 온 사람들은 평양옥을 냉면집으로 오인한다. 평양이라는 지명 때문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메뉴는 해장국이다. 고 신태범 박사의 ‘먹는 재미 사는 재미’에 실린 인천의 향토 음식, 해장국 이야기를 살펴보자. 끝에 평양옥 상호도 보인다.
“쇠뼈와 배추 우거지를 밤새 끓여 내는 토장국이 인천식 해장국이었는데 쇠뼈의 기름기와 재래식 된장이 어울려 풍기는 구수하고 부드러운 맛이 향수어린 토속적 미각을 느끼게 했다. 5전(錢)만 내면 막걸리 한 사발에 국이 한 뚝배기라 아침 요기가 되고, 곱빼기를 시키거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찬밥 덩어리를 국에 말아 먹으면 충분한 아침 끼니가 되었다. 해장국이란 이름은 술에 곯은 속을 푼다. 또는 빈속을 달랜다는 뜻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근사한 설도 있으나 어느 쪽이건 간에 근로자층의 변함없는 환영을 받고 있었다. 해장국집은 터진개 골목(신포동)과 답동 상밥집 거리, 그리고 용동 술집 골목에 여러 집이 모여 있었는 데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집은 하나도 없다. 현재 신흥동의 평양옥과 신포동의 답동관이 그 당시의 해장국 모습과 맛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이 몹시 대견스럽다.”
인용이 길어졌으나 신 박사의 구수한 문장을 통해 유일하게 우리 인천 향토 음식의 맥을 잇고 있는 평양옥 해장국의 실체를 부연 설명 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향토성과 오랜 세월 변함없는 맛이 지난 7월 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펴낸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 100군데에 선정된 요인이다. 다만 신포동의 답동관은 1980년대 중반 무렵 개축했는데 그 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평양옥에는 가족단위 손님이 유독 많다.
1970년대 작업복 입은 박 대통령도 단골손님
실제 평양옥에는 해장국 외에 냉면도 중심 메뉴에 들어 있다. 여기 냉면은 길거리에 흔한, 냉면이랄 수도 없는 소속 불명의 잡면들과는 달리 육수가 독특한 향미를 띄는 데다가 면발도 나무랄 데 없이 입에 상쾌하다. 이 역시 전통의 인천 냉면 맛인데 요즘 사람들은 이 맛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우리 또래가 음식점 출입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1960년대에는 갈비탕이 더 높은 평판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대접에 담긴 진하고 기름진, 그러나 느끼하지 않고 구수한 국물과 잘 고아진 푸짐한 갈비는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설렁탕도 한때는 인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메뉴에서 빠졌다. 뭐니 뭐니 해도 당시 최고급 메뉴는 양념 쇠갈비였는데, 늘 남의 자리에서 풍겨 오는 굽는 냄새만 맡을 수 있었지 풍족하게 먹어보지는 못했다.
평양옥에는 그 성가(聲價)대로 유명 인사들이 많이 출입했다. 개업 초기에는 광복 직후 부활된 경평전(京平戰) 축구시합에 출전하는 고향 선수들에게 냉면 배달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평양옥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출입.
박 대통령은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면 이따금 작업복에 모자를 눌러 쓴 채 들어와 자리에 앉곤 했다는 것이다. 대동한 경호원 한 명과 마주앉아 해장국을 먹는 박 대통령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한 시민이 “저 사람 대통령이다” 하자 박 대통령이 “아, 이제 여기도 못 오겠네”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 대통령도 월미도 해역사령부를 순시하고 불시에 들어와 갈비와 냉면을 먹고 가기도 했다. 근처에 인천실내체육관이 있어 정치의 계절에는 유명 정치인들이 행사 뒤에 평양옥을 찾았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이회창 전 대표, 정주영 회장, 박근혜 전 대표 등이다.
가깝게 인천야구장과 육상장도 있었기 때문에 운동선수들도 많이 드나들었다. 오비베어스 박철순 투수, 윤동균 선수, 삼미슈퍼스타즈의 장명부 투수, ‘우생순’의 임병철 감독, 축구의 신태용 감독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향수를 부른 가수 이동원과 신승훈도 인천에 오면 꼭 들르는 고객이다.
기억 속에는 인천 어른으로 최정환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신태범 박사, 유충렬 광성고 교장, 노창현 부시장 등을 이 집 객실에서 직접 뵌 적이 있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신다.
평양옥 해장국의 맛에 대한 정평은 이미 과거에 홍성유 작가가 내렸고, 인천에서는 신태범 박사가 글을 남겼다. 집안 곳곳에 유난히 우환이 많았었지만 서북인(西北人) 기질 그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인천 최고(最古)의 해장국집으로 우뚝 서 오늘에 이른다. 정녕 ‘대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0년 가까이 변하지 않는 음식 맛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백 년을 넘어 백오십 년, 이백 년, 대를 물려 전통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 구수한 맛과 분위기 길이 불변해서 온 세상에 인천 해장국의 대명사가 되기를 기원한다.
※ 다음호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식당은 강화도 백반집 ‘우리옥’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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