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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백반의 맛, 담백한 비지찌개가 별미
59년 백반의 맛,
담백한 비지찌개가 별미
늦은 점심이기도 했지만, 식탁 옆 벽에 해 놓은 누군가의 낙서 내용대로, 오래 전에 잊었던 ‘어머니 맛’이 확 느껴져서 모두 게 눈 감추듯 밥 한 그릇씩을 뚝딱 해치웠다. 물론 전날의 숙취를 풀 겸해서 대구매운탕 냄비를 따로 주문하고 막걸리도 한 통을 곁들였다. 일행 중에 사진작가는 밥상 풍경을 앵글에 담느라고 연신 셔터를 눌러 대었지만 나머지 둘은 오불관언 부지런히 수저를 놀렸다.
글. 김윤식_시인 사진. 김보섭_자유사진가

끼니 밥상에서 느끼는 ‘미각의 향수’
백반은 특별한 찬을 마련한 별식이 아니라 그저 끼니 밥상에 가까운 것인데, 그래서 더욱 미각의 향수를 진하게 느끼게 하는지 모른다. ‘미각의 향수’라는 말은 역시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께서 저서 <우리 맛 탐험>에서 쓰신 표현이다.
“예전에는 모든 먹을거리를 거의 집안에서 어머니가 손수 마련해 주셨으므로 미각의 향수는 어머니 손끝 맛에 집중되었다. 나이가 들어 그때의 어머니 연세와 가까워질수록 그 강도와 빈도는 더해 간다.”
이 대목이, 매우 정확하게 감성을 표출한 원문의 일부분인데 가슴 전체로 공감하게 된다. 어머니와 음식!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생명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 다만 박사께서는 ‘어머니 손끝 맛’이라는 표현을 쓰셨지만, 또 실제 우리옥 벽 낙서도 ‘어머니의 손맛’이라고 쓰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어머니 맛’으로 쓴다. 내게는 그냥 어머니 맛일 뿐이다. 구수하고, 슴슴하고, 매콤하고, 짭짜름하고, 그래서 전체가 마냥 푸근하고 마냥 넉넉한 향수!
그날 우리옥의 찬은 조린 꽁치 토막에 멸치볶음, 도토리묵, 두부조림, 고춧잎 나물무침과 탕깨에 담아 낸 시큼하게 익은 배추김치, 순무김치, 콩나물국 따위였다. 이제 강화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지만 조개젓도 입에 사뭇 개운했다. 거기에 붙박이로 딸려 나오는 담백한 비지찌개 역시 또 다른 별미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강화에 와서 우리옥을 찾는 것은 찬의 가지 수가 넉넉한 이유도 있을 터이지만 그 그릇 하나 하나가 내는, 한국인의 미각에 각인되어 있는 이 구수하고, 슴슴하고, 매콤하고, 짭짜름한 ‘어머니 맛’을 잊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우리집으로 갑시다’로 시작된 상호명
막걸리를 한잔 쭉 들이키고는 매운탕 국물을 몇 숟가락 떠 넣는다. 그 얼큰함, 개운함이 좀 전까지 어질하게 남아 있던 머릿속 술기운을 쫓아 버리고 시원하고 뿌듯하게 해장을 시켜준다. 돌아와 생각하니 토장에 찍어 쌈을 싸먹은 삶은 호박잎은 또 얼마나 훈훈한 맛이었던가!
지난 7월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에 선정된 전국의 100군데 대표 식당, 밥집 중에 백반집은 인천 중구의 명월집과 여기 강화의 우리옥 두 군데뿐이라고 한다. 워낙 유동 인구가 많은 도시여서 오가는 사람들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 상밥집이 발달을 한 것인지 모른다.
아무튼 두 집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제각각 꾸려져 왔다. 그런데 묘하게도 몇 가지 유사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의 신상 경력이나, 우연히 지어진 옥호의 작명 같은 것이 그렇다.
우리옥은 1953년, 휴전되던 해 친정 고모가 지금 주인 방영순(方英順)씨와 언니, 그리고 방씨의 사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밥집을 냈던 것이 시초다. 고모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일찍 부모를 여읜 조카 방영순씨 자매들을 키우고 공부시켰다고 한다. 물론 다른 생계 수단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밥집을 하게 된 데에는 그 당시 강화문화관장으로 있던 유지영(劉智榮) 씨라는 분의 종용 때문이었다. 문화관 직원들은 대놓고 먹을 마땅한 밥집을, 방씨의 고모는 수입이라는 이득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처음 밥집은 시장 근처에다 옥호도 간판도 없는 그런 집이었다. 우리옥이라는 이름은 유지영 관장은 늘 점심때가 되면 주위 사람들에게 “자, 식사하러 ‘우리 집’으로 갑시다.”라고 말하면서 얻어진 별명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얻어진 옥호였다.
유지영 관장이 방영순씨 고모의 백반집으로 직원이나 손님들을 이끌고 오면서 “우리 집” 운운했던 것은 우선 음식 맛 때문이었다. 고모가 내놓는 상밥은 ‘집에서 먹는 밥 맛’ 그대로였던 까닭에 ‘우리 집’이라는 말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유 관장의 부인과 방영순씨의 고모가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훗날 인천시장을 지내는 윤갑로(尹甲老) 군수가 그 후 유지영씨와 자주 동행하면서 ‘우리옥’이 확실한 상호로 굳어지는 내력을 가진다. 윤 군수는 1946년 강화문화원의 전신인 강화문화관 초대 관장을 지냈고, 유지영씨는 뒤이어 2대 관장을 맡았으니 두 사람이 자주 어울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 집, 우리 집” 하던 것이 실제 음식업 허가서에는 ‘집’ 대신에 ××옥 하는 식으로 ‘옥’ 자를 넣은 것이다.
5,60년대 춥고 헐벗은 이들을 품었던 밥집
중구의 명월집처럼 이렇게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우연에 의해 상호가 정해진 점 외에도 두 집 주인이 가졌던 비슷한 전직(前職)이 또 흥미롭다. 강화 토박이 방영순씨도 처음에는 상고를 나와 양도면사무소에서 약 8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통근이 힘들어 강화 경아직물로 이직한다. 그곳 경리부에서 역시 8년 가까이 근무를 한 것이다. 결혼 후에도 얼마 동안은 회사에 나가다가 아이를 가지게 되고, 또 늙고 외로운 고모를 모시기 위해 쉬게 된다. 고모를 모시다 보니 결국 밥집을 맡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근처가 다 시장이어서 역시 시장 상인이나 근처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50년대, 60년대, 집에서 찬 보리밥 덩이를 들고 나와 국물만 사 먹던 야채 행상 아주머니들, 아이들이 딸린 오갈 데 없는 과부 아주머니가 가게에서 살다시피 해 식구만 해도 10식구가 넘던 때, 배고픈 사람들의 퀭한 눈동자…. 고모도 방영순씨도 그들을 차마 배고프지 않게 끌어안고 살아왔다. 그것이 남의 허기를 채우는 백반 장사들의 고운 마음이었다.
아침에는 굵은 소나기가 내려 이 비 내리고 나면 가을이 더 깊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차를 달려 왔는데 강화에 도착하니 해가 나고 하늘이 눈물이 나도록 새파랗게 드러나서, 물론 백반과 파란 가을 하늘이 내심 좀 덜 어울린다 하는 느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때 생전의 어머니 생각이 왈칵 솟구쳤다. 밥을 먹고 길가로 나와 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184번지, 도시 계획으로 옛집은 헐리고 20여 평 가건물로 변한 59년 우리옥 뒤쪽 하늘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우리옥 ☎773-7890
※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은 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선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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