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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은 여전히 우리의 ‘중심’
동인천은 여전히 우리의 ‘중심’
인천사람 가운데 소싯적 동인천에서 놀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공간은 낡아 인천의 ‘중심’은 어느새 ‘변두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생에 가장 빛나던 시절과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글. 정경숙 본지편집위원 사진. 안영우 자유사진가

‘주변’ 되어 버린 인천의 ‘중심’
7,80년대 서울에 명동이 있다면 인천에는 신포동과 동인천역 일대가 있었다. 학창시절 주무대가 아니더라도 인천사람 가운데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72년에 생긴 인천 최초의 지하상가인 동인천 지하상가도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공간은 낡아 주안, 부평에 밀리더니 ‘중심’은 어느새 ‘변두리’가 되고 말았다. 곳곳에 굳게 내려진 샷다와 그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점포임대’ 안내가 과거의 영광과 교차되어 쓸쓸함을 자아낸다.
“그땐 굉장했어요. 지상과 지하가 인천 최대의 상권으로 서로 부딪치며 다닐 정도로 사람이 많았지요. 인천에서 새 신발 새 옷 하나 장만하려면 꼭 이곳에 들릴 정도였으니까요.”
지하상가에서 아들과 함께 금은방 ‘도레미양행’을 운영하는 동인천의 터줏대감 옥현철(51)씨는 그때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사람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인천 최고의 번화가, 바로 인천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는 동인천의 모습이다.

이야기+
도레미양행의 모태는 그 옛날 극장광고에도 종종 등장했던 도레미소리사. 아버님이 운영하던 소리사는 전파사가 되었고 금은방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도레미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그 세월이 50여 년이다. 가게는 원래 중앙시장에 있다가 북광장역을 조성하면서 지하상가 안으로 옮겨졌다. 30여 곳에 이르던 금은방 가운데 지금은 10군데 정도가 살아남았고, 한때 돈 걱정 손님 걱정 없던 장사는 지금 영 시원치 않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5,60대 어르신 상인들 사이 눈에 띄는 아들 보형(27)씨, 스스로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그에게서 동인천의 희망을 본다.
화려하진 않지만, 잘나갔던 그곳
신포동부터 동인천역 인근까지 길게 늘어선 지하상가는 72년 새동인천을 시작으로 74년 동인천, 77년 중앙로, 80년 인현, 83년 신포까지 모두 5개의 지하상가가 이어져 조성됐다. 그 시작이 서슬 퍼런 시절 국가보안을 위한 주민대피가 주 이유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처음 대피시설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하도는 냉난방과 환기가 미흡했고 일반 형광등과 백열등으로 조명을 밝혀야 할 만큼 열악했다. 상인들 스스로 힘을 모아 시설을 현대적으로 리모델링 한 건 2002년이 되어서다.
“개보수 전에는 인테리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벽열등을 켜고 합판에 벽지를 대충 발라놓은 가게도 있었지요. 그래도 인천에서 지하도상가라곤 이곳 밖에 없으니 사람들이 물밀 듯 몰려와 정신이 없었어요.”
황인환(46)씨는 18년 전부터 이곳에서 옷 장사를 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먹고살기 좋았던 때를 추억하는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여기서 36년 동안 신발을 팔아 온 ‘ssazio’의 주인 김갑숙(57)씨도 동인천의 전성기를 말해준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양화점 점원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1년 후 바로 사장으로 신분상승했다. 20여 년 전 한창 때는 당시 공무원 한 달 월급이던 40만원을 하루에 다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시대의 흐름을 피할 수 없어 휴대폰판매로 업종을 바꾸었다가, 단골들을 외면할 수 없어 최근 매장 한편에 신발가게를 자그맣게 다시 열었다.

락에서 뽕짝으로, 동인천 나이 들다
90년대 초반 만해도 동인천 지하상가는 젊음으로 물결쳤다. 젊은이들을 이끈 것 중 하나가 레코드가게였다. 8, 90년대 여기에는 10여 곳이 넘는 크고 작은 음반점들이 모여 호황을 누렸다. 가요부터 팝, 재즈,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어 굳이 음반을 사러 서울까지 나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가게는 단 두 곳뿐. 처음에는 모두 한사코 촬영과 인터뷰를 사양했는데, ‘음악세계’의 이천숙(58)씨와는 음악이야기를 하며 마음을 텄다. 좋아하는 밴드는 ‘건즈 앤 로지스’, ‘드림 시어터’, ‘마릴린 맨슨’… 세상에, 나이가 60에 가까운 지금도 파워 메탈밴드 ‘감마레이’의 음악을 듣는단다. 하지만 음악이 좋아 29년 째 가게를 지키고 있는 주인은 손님을 배려해 트로트를 틀어놓는다. 가게 안을 가득 메운 7080음악과 트로트메들리, 저 높이 먼지 자욱이 쌓여 바래가는 팝송 테이프가 그 까닭을 말해준다. 팝송에서 뽕짝으로, 동인천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었다.
팬시점 ‘캔버스’도 참 유명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학교가 파하면 학생들은 이곳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15명이나 되는 점원들이 의자 위에 올라가 망을 보아도 보이는 건 까만 머리뿐, 학용품 서리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변 학교가 구도심을 벗어나고 학생들이 떠나면서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줄어들었다. 가게 한편에 마련된 좌판에 양말과 속옷을 고르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의 손길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야기+
학생들이 모이다보니 생긴 에피소드 하나. 당시 지하상가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입구를 지키던 매점 할머니에게 돈을 내야만 했다. 할머니는 까치담배를 팔기도 했는데,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보기에는 아저씨도 청년 같고 학생도 청년 같았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학생들이 감쪽같이 50원과 담배 한 개비를 바꿔치기 하곤 했다. 그 분을 뵐 수 있을까, 상인들에게 물으니 돌아가셨는지 어디 살아 계신지 아무도 몰라요, 라는 답이 돌아온다.

동인천의 시간은 지금도 흘러 간다
그래도 신포문화의 거리와 애관극장 일대, 동인천역을 끼고 길게 쭉 뻗은 신포지하상가와 중앙로지하상가는 예전만은 못해도 사정이 낫다. 의류와 잡화 매장과 뷰티숍이 몰려 있어 젊은 사람들도 꽤 눈에 띈다. 외국인들도 보인다. 주로 뱃길을 통해 인천으로 들어오는 중국인과 외국인 노동자, 중고차 매매업을 하는 중동사람들이다.
30년 전 처음 터를 잡은 안정원(56)씨의 화장품 가게는 아직도 성업 중이다. 그동안 한때 종합화장품 가게 붐이 일고 또 언제부턴가 저가 브랜드가 쏟아져 상가를 장악했다. 초창기 함께 했던 두 곳의 화장품 가게는 문 닫은 지 오래. 하지만 이곳은 예전처럼 식사할 시간이 없을 정도는 아니어도, 단골이 많아 여전히 장사가 잘 된다. 때마침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다. “엄마, 필요한 거 말해봐. 이왕이면 샘플 들어있는 것으로 푸짐하게 챙겨드릴게.” 먼저 의자에 앉혀드리고 오래도록 제품을 골라드린다. 샘플 용기에 일일이 펜으로 용도를 적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친절함과 인간다움이 그를 지금껏 이 자리에 지탱하게 했으리라.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와 덜컹거리는 1호선에 몸을 싣는다. 창밖에는 어둠이 펼쳐져 있다. 가만히 동인천의 현재를 헤아려본다. 앞으로 10년 이곳은 또 어떤 모습일까. 분명한 건, 동인천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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