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진시황의 ‘불로초’는 눈 부릅뜬 병마도용
2013-12-31 2014년 1월호
진시황의 ‘불로초’는
눈 부릅뜬 병마도용
아시아는 ‘거인’이다. 40억 인구가 창출하는 경제와 문화의 힘은 엄청나다. 아시아인의 화합과 평화의 대제전 아시아경기대회는 이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다. 아시아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그 대회에 대한 지구촌의 이목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 2010년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아시아경기대회는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아시아 국가 및 도시를 시리즈로 탐방해 그 잠재력과 미래의 희망을 확인한다.
글 사진 김성환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수수께끼로 가득 찬 진시황릉
총 면적 : 56.25㎢ / 릉을 수리하는 데 걸린 시간 : 38년
동원된 인부 : 72만명 / 지금까지 릉구에서 발견된 배장갱, 배장 묘 : 600여 개
고도(古都)이자 미래도시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은 국빈으로 중국 성서성 서안 지역을 방문해 눈길을 끌었다. 그 많고 많은 도시 중에 왜 서안이었을까. 서안은 5000년 중국대륙 역사의 고도(古都)로 중국인의 자부심이며 중국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부대개발 정책의 중심도시다.
이제 서안은 역사적으로나 미래 전략적으로나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도 진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과 양귀비, 진시황제 삼장법사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은 서안이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6천여 개의 병마도용(무덤 주위에 묻어 두던 인형)으로 이루어진 지하군단은 진시황제의 사후를 위해 그들을 갱 안에 가두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서안은 진시황제의 병마용을 보러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아시아 최고의 관광도시 중 하나로 부상했다.
진시황은 사후에 대한 두려움과 영생을 꿈꾸며 병마용을 만들었지만, 오늘날은 그것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서안이라는 도시는 물론 중국의 핵심적인 문화유산을 안겨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시황이 꿈꿨던 불로초는 결국 수천 년이 흘렀어도 사라지지 않은 ‘병마도용’이었던 것이다.

진시황의 위대한 지하궁과 병마용
세계 8대 기적 혹은 ‘20세기 고고학 역사상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라고 불려지는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은 중국 성서성 서안시 임동구에서 북동쪽으로 약 1.5㎞떨어진 곳에서 진 병마용갱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세기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진 병마용갱의 발견, 발굴 그리고 전시로 인하여 진시황릉은 일찍이 1987년에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에 의해 인류문화 유산 명록에 등재되었다.
진시황(B.C.259~210)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봉건왕조의 개국 황제다. 그는 진 장양황의 아들로 13세에 왕위에 올랐고, 39세에 칭제하였다. 그리고 B.C 230년부터 B.C 221년까지 한, 위, 초, 연, 조, 제 등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하고, 마침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다민족적 중앙집권제 봉건국가인 진조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만일 진시황을 알기 원하다면 서안에 가서 시황제릉과 병마용을 보라고’. 그만큼 병마용은 인류역사상 불가사의하리 만큼 대단하고 경이로운 유물이다. B.C 221년, 만 50세가 된 진시황은 그 자신이 이루어 놓은 광할한 영토 내에서 최후의 순유를 하던 도중 사구(지금의 하북성 광종현)에서 병사하였다. 진시황의 유해는 함양으로 운반해 진시황릉에 장사를 지냈고, 방대한 병마용 군단이 이 천고일제인 진시황을 따라 지하세계를 정복하러 가게 되었다.
봉토 밑의 지하궁은 현 지표면으로부터 약 30m 깊이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주위에는 정방형에 가까운 지하 성벽이 둘러쳐져 있다. 지하궁 내부의 모습에 대하여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이 막 즉위했을 때 여산을 천착하여 분묘를 건조하였다. 그는 천하를 통일한 후 전국 각제에서 모은 70만여 명의 형도로 하여금 삼층이나 되는 샘을 뚫고 구리를 녹인 물을 부어 틈을 막은 후 자신의 외관을 그 곳에 두게 하였다. 또한 궁관, 백관 그리고 진기한 보물들을 가져다 그 곳에 가득 채워 놓았다. 게다가 공장(장인)에게 명하여 기관부가 딸린 활을 만들게 하여 만약 어떤 자가 도굴하러 이곳에 들어오면 맞아 죽게 하였다. 또한 수은으로 백천, 강하, 대해를 본떠 천문 도안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아래로는 지리 도형으로 배치했다.”
1997년 이후 진흥에서의 중요한 발굴은 매년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600여 개의 병마용갱 중 가장 큰 곳이 1호 갱인데 동서 방향의 직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그 길이는 가로가 230m, 세로가 62m이고, 면적은 1만4천260㎢다. 특히 매장되어 있는 병마들은 모두 다른 표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화청지(華淸池), 양귀비의 향기를 찾아
양귀비(719년~756년)의 실제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양귀비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며 이름은 양옥환이고 현종과 무혜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수황(이모)의 비로 17세때 궁에 들어 왔으나, 시와 노래에 뛰어나고 보기드문 절세의 미인으로 현종의 눈에 든다. 현종은 자신의 아들인 수황(이모)에게서 며느리인 양귀비를 빼앗아 자신의 비로 삼았다. 그리고 양귀비는 뛰어난 미모로 일본의 ‘오노노 고마치’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더불어 세계 3대 미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4대 미인(양귀비, 서시, 왕소군, 초선)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화청지와 양귀비는 무슨 연관이 있는걸까?
당나라 때로 거슬로 올라가 보자. 양귀비는 원래 현종의 친아들인 수황의 아내였다. 그러나 아버지 현종은 한눈에 양귀비의 미모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현종과 양귀비는 이곳 화청지에서 세기의 러브스토리를 만들었다.
아내를 아버지에게 빼앗긴 수황, 자식뻘 되는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스스로 몰락해 간 현종, 당나라가 멸망의 길로 가던 중에 결국 양귀비는 현종의 지시에 따라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양귀비의 스캔들은 중국을 대표하는 세기의 로맨스가 되었다.
화청지에는 몇 개의 사원 이외에도 양귀비가 사용했던 목욕탕의 흔적이 있어 양귀비의 향기를 느끼려는 많은 여성 관광객들이 몰린다. 화청지는 주나라 때부터 3천년의 역사를 지닌 서안의 대표적 명소이자 온천지로 그 명백을 이어오고 있다.

- 첨부파일
-
- 이전글
- 응시凝視하라, 2014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