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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추억을 깎다

2014-01-06 2014년 1월호


이발소,추억을 깎다

40대 이상 중장년들에게 이발소는 단순히 머리만 자르던 곳은 아니다. 동네 사랑방이었고, 문화의 중심지였다. 바깥일로 바쁜 아버지와 아들이 오랜만에 머리를 깎으며 부자의 정을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던 시간이 스민 장소였다. 사람사는 냄새 솔솔 풍기며 동네 이정표 노릇을 했던 이발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미 사라지는 업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것을 증명하듯 대부분의 이발소들이 낡고, 초라해 시간이 멈춘 듯하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숭의동 신광이발소   60년간 이발소로 명맥이어

신광이발소는 빨간색 기와를 얻은 단층 구조 건물이 제법 이발소다운 운치를 보여준다. 건물 외벽에는 빨간색 파란색의 이발소 표시등이 달려있다. 이 집은 이발소로 만 60년간 명맥을 이어왔다. 이원호 사장(63)은 앞서 이발소를 운영한 사람에게 ‘바리깡’을 건네받아 21년째 신광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전라북도 장수가 고향인 이 사장은 20세 무렵부터 기술을 배워 40여 년 넘게 이발로 생업을 잇고 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이발 기술은 그에게 시골에서 빨리 돈 벌고 밥먹고 살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눈썰미가 좋고 손놀림이 빨라 오라는 가게도 많았다.
그가 인천에 정착한 것은 1993년. 처음에는 다른 가게에서 월급생활을 하다 지금의 신광이발소를 인수했다. 가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이발소는 경기에 민감한 업종이에요. 시민생활과 관련이 깊어요. 김장철이나 새 학기때 돈 많이 들어갈때는 이발소가 안되요. 돈이 딴 데 들어가면 머리깎는 걸 아끼잖아요.”
신광이발소는 아직도 연탄난로를 핀다. 이발소 내부는 7,80년대에 머문 듯 정겹고 예스럽다. 의자나 가게구조도 옛 모습 그대로다. 손님도 대부분 40대 이상이다.
이 사장은 이발소가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건설경기가 좋을때까지는 잘 됐다고 회고한다. 평일에도 줄서 서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고, 명절에는 새벽 2,3시까지 일할 정도였다. IMF 전 얘기다. 특히 이곳은 용현시장이 있어 상인 단골이 많았다. 요즘은 하루 10명도 자르기 힘들 때도 많다.
남구에도 예전 360여 개의 이발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200여 개로 줄었고 이중 영업하는 곳은 60~70%선이다. 이 사장은 이발소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는 ‘자기 손에서 손님이 오고간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성실하고 친절하게 손님의 머리를 매만진다. 
문의 : 881-0204



송림동 세기이발관   드라이 잘하는 이발사로 유명
송림동 세기이발관 김운식 사장(72)은 동구 내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사다. 지금은 사람들이 떠나간 구도심 한가운데에서 이발소를 지키고 있지만 한때는 드라이 잘하는 이발사로 꽤나 이름이 있었다. 그는 송림동에 가게를 열기 전 경동의 ‘성심이발소’라는 유명 이발소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주특기는 이발과 드라이였다.
그가 송림동에 세기이발관을 개업한 때는 1977년. 자기 가게를 연 재미도 있고, 일하는 것이 좋아 아침 일찍 나와 저녁 늦게까지 일했다. 이발관이 한창 잘될 때는 세발, 면도만을 전문으로 하는 직원만 5명을 두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잘되던 가게도 IMF가 터지면서 손님이 줄었고, 수도국산에 살던 주민 3천 가구가 재개발과 함께 떠나면서 손님은 더 줄었다.
세기이발관은 김 사장이 개업했을 당시 모습 그대로다. 이발소 이름은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닳았고, 오랜 형광등, 머리감을 때 쓰던 조루, 10여 년이 넘은 드라이기가 이발소의 오랜 흔적을 말해줄 뿐이다.
김 사장은 아직도 이발을 할 때 하얀 가운을 입는다. 지금 이발사들이 가운을 입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내가 구식이라서 그렇지 뭐.” 김 사장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가게는 손님들과 함께 늙어간다. 세기이발소를 찾는 손님 대부분은 60대 이상이다.  
그래도 이발소 하면서 아들딸 학교 공부시키고, 결혼하여 출가시킨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보람이다. 직업으로 이발사를 선택한 것도 잘한 일로 생각한다. 이 나이에 자기일 하면서 돈도 버는일이 어디있겠냐며 이발사를 최고의 선택, 최고의 직업으로 꼽았다.  문의 : 765-7971


 
구월동 우석이발관   머리결 만으로 손님을 알아봐
머리빗과 잘드는 가위로 정교하게 머리칼을 잘라낸다. 45년 기술을 자랑하는 이발 장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우석이발관 박명남 사장(62)은 17세부터 이발기술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도 이발사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머리도 감기고 면도하는 법을 배우면서 이발사의 길로 들어섰다. 첫 개업은 78년 주안역부근 성지이용원이다. 박 사장에게도 이발사의 호시절은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다. 그때는 하루 종일 손님들이 줄서서 기다리는 것은 예사였고, 여학생들도 상고머리, 단발머리를 이발소에서 잘랐다. 미용실이 기계로 컷을 하는데 반해 이발소는 빗과 가위를 이용해 머리칼을 하나하나 정교하게 잘라낸다. 그러다 보니 미용보다 시간도 더 많이 들고 힘도 곱절은 든다. 이발사들의 주요 기술중 하나인 역 가위질은 다년간 훈련을 필요로 하기에 미용사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고도의 기술이다.
그의 가게엔 오래된 이발기구들이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박사장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다. 30년된 수동바리깡, 40년이 넘는 양도, 일도형 면도칼이 켜켜이 쌓은 세월을 말해준다. 그 이발기구들로 3,40년 된 단골손님들의 머리를 깎고 면도를 했다.
30년 넘게 이발을 하다보니 그는 손님의 머리만 봐도 어떤 가위를 써야 할지 안다. 가게엔 10개가 넘는 이발가위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꽂혀있다. 우석이발관은 다른 이발관에 비해 현대적인 시설을 갖췄다. 내부 인테리어도 깨끗하고 세련됐다. 박사장은 이발소들의 살길은 시설도 개선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혀 손님이 오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길만이 이발업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길이라 믿고 있다.  문의 : 468-5250

오래된 이발소 살리기 프로젝트

‘아들아! 아버지하고 머리깎으러 가자’

우리시가 갈수록 낙후되어 사람들이 가고싶지 않는 곳으로 변하고 있는 이발소 활성화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6,7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이발소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머리를 깎고,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사랑방이었다. 그러던 이발소가 세상의 흐름에 함께하지 못하면서 점점 없어지는 업종, 사라지는 직종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에 우리시는 이발소를 국제도시에 걸맞게 이미지를 제고시켜 신성장 부가가치산업으로 유도하고 있다. 또 업소의 문제점을 파악한 후 고객 위주의 서비스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여, 내부가 보이고 깨끗한 가고싶은 이용업소로 만들고 있다.
우리시는 이발소의 오래되고 낡은 이미지를 개선하는 방법중 하나로 세련된 표지판을 개발했다. 새로 디자인한 표지판은 지정업소에 설치해 새로운 이미지와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이발사들에게 전문적인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 재교육도 실시할 예정이다.
시는 이발소 프로젝트를 통해 편안하고 깨끗한 이발소 이미지를 만들어 직업의 자긍심은 물론 시민들이 다시 찾는 이발소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문의 : 440-2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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