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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찬란히 빛날, 60년의 영광

2014-02-05 2014년 2월호

더 찬란히 빛날,
60년의 영광


글 정경숙 본지편집위원  사진 김보섭 자유사진가



그는 타고난 레슬러다. 인천 레슬링의 아버지 임배영(85).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 뚜렷한 눈매와 단단한 풍채에서 나오는 위엄은 세월도 어찌할 수 없다. 레슬링은 가장 남자답고 원초적인 스포츠다. 치고 박고 뒤집고 죽기 살기로 상대를 제압해야 승패가 갈린다. 그 타고난 기질을 알아 본 사람이 김석영이다.
김석영은 30년대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레슬링을 한 지성을 갖춘 스포츠맨이었다. 일본에서 웰터급 1인자로 등극한 김석영은 8·15 광복 후 인천에 레슬링을 보급하기 위해 인천신사 자리에 도장을 차렸다. 그 초기 제자 가운데 하나가 임배영이다. 그는 덕적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으로 와 레슬링 도장을 찾았다. 그때 나이가 16세. 학업이 끝나면 그 길로 도장으로 가, 해가 뜨고 질 때까지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고 심지어 스승까지 잃는 불운이 그를 덮쳤다. 그래도 최고의 레슬러가 되겠다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쟁으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도장에서 밤늦게까지 홀로 땀 흘리고, 전국체전에 참가하기 위해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도 광주로 갔다. 그 대회가 1952년 헬싱키올림픽 1차 예선을 겸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회에 출전해야 했다. 그는 레슬링에 한한 집요하고 무서운 힘을 지녔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전쟁보다 더한 시련이 찾아왔다. 헬싱키 행을 한 달 앞두고 정부의 예산 부족으로 끝내 세계무대에 서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한국이 처음으로 출전한 아시아경기대회인 1954년 마닐라 아시아경기대회에 나가 동메달을 땄다. 이후 임배영은 인천에서 김화경, 최영길, 김문기 등 수많은 레슬링 국가대표들을 키워냈다. 특히 장창선은 우리나라 레슬링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며 그가 못 다한 꿈을 이루었다. 지금도 그는 인천 레슬링의 아버지이자, 인천체육인회장으로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 그런 그에게 있어 2014년은 매우 특별하다.
“올해는 내가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해 메달을 딴 지 60주년이 되는 해야. 더군다나 인천에서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니 그 감격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 인천은 긴 세월 대한민국의 체육을 이끌어 왔어. 후배들이 자부심을 갖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으면 좋겠어.”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떨어지는 해를 보며 ‘내 인생도 저렇게 저물어가고 있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인천체육의 오늘을 있게 하고 앞으로도 귀감이 되어 줄 빛과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언제까지나 그는 아시아를 움직인 최고의 레슬러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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