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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노동의 기억 도시의 추억, 공장’

2014-02-05 2014년 2월호
 
정윤수의 ‘노동의 기억 도시의 추억, 공장’

투박한 ‘공장 도시’의
진짜 민낯이 궁금해?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공장’이란 테마로 책을 출판한다면 인천을 무대로 설정하는 게 맞다. 공장의 숫자, 그 역사적 배경, 그리고 공장 담에 기대 온 주민들의 삶 등 이런 유의 이야기를 펼쳐 놓을 수 있는 곳으로 인천을 능가할 도시는 없다. ‘노동의 기억 도시의 추억, 공장’(정윤수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는 “테마, 지대로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노동의 기억 도시의 추억’, 이 부분에 방점을 찍은 책이라면 이 책이 맞다. 그런데 ‘공장’, 특히 ‘인천공장’이란 테마로 서술한 책이라면 그 묘사는 조금 맹숭맹숭하다. 인천공장은 이 책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술술 넘어가지 못하는 공간이다. 투박하고 무식하고 거칠기 이를 데 없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나는 거대한 공장 담으로 둘러싸인 동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 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말뚝 박기를 했고 매일 그 담을 골문 삼아 축구를 했다.

내가 태어난 동구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중후 장대한 공장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 대낮에도 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게 스모그인지 안개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산업화 시대 누구 하나 그것을 탓하거나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교과서에 우리 동네 공장들이 나온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 동네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철가루를 들이마셔 ‘일찍 철든다’는 자조적인 말만 오갔다.
나는 공장 앞 큰길에 태극기를 들고 나간 적도 있었다.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제5공화국 출범 후 전두환 대통령은 산업시설 시찰 행사로 동구 송현동의 인천제철을 택했다.
시찰단 일행은 인천제철 쪽을 가다가 인근의 산동네를 보고 깜작 놀랐다.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사는 달동네가 그곳에 있었다. ‘아니 인천에 아직 저런 동네가 있다니….’ 이 길은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귀빈들의 산업 시찰 루트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이런 비참한 풍경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통령의 철거 지시가 바로 떨어졌다. 1982년 불량주택 531채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10평에서 20평짜리의 5층 공영아파트 송현라이프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인천제철은 1978년 4월 현대그룹으로 흡수되면서 ‘현대제철’로 그 이름이 바뀐다. 이 대목에서 ‘경영인’ 이명박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해 6월 현대제철 사장으로 이명박이 취임한다. 그는 1981년까지 약 3년 동안 현대제철 사장직을 맡는다. 1991년경 정주영 회장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즈음 이명박 사장은 정 회장에게 현대제철을 요구했다는 설이 있다. 한마디로 거절당했고 이후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게 인천공장이 품고 있는 이야기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우리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인근의 크고 작은 공장에 다녔다. 어른들은 여름 밤 멍석 깔고 앉아 이런 이야기들을 흔하게 주고받았다.


노동의 기억. 정확히 얘기하면 노동과 관련한 기억은 별로 없다. 공장지대에 살았지만 노동쟁의, 파업, 노동조합 등 노동과 관련된 일에 대해 듣거나 더욱이 목격한 적이 없다.
노동의 기억은 없지만 그 생생한 흔적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동구 화수동 183번지. 그곳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태동한 곳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산업화 시절의 노동 운동과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의 불씨를 키워온 곳이다. 1961년 9월 미국 감리교의 조지 오글 목사는 화수동 183번지의 낡은 초가를 구입해 ‘인천산선(인천도시산업선교회)’을 설립했다. 그는 추방되기 전 까지 이곳에서 한국인 목회자들과 함께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인천산선은 김근태 등 유력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인천 동구에는 동일방직,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이천전기, 한국유리 등 큰 공장들이 많이 있었다. 선교회는 산업사회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화해자로서의 사명으로 직접 작업 현장에 들어가 이른바 ‘노동자 의식화’ 사업을 펼쳤다. 한때 도시산업선교회는 ‘도산’이라 불렸다. 도시산업선교회가 기업에 침투하면 그 기업은 도산한다며 산선을 ‘빨갱이’ ‘공산당’이라고 몰아세우며 끊임없는 감시와 무차별 탄압을 펼쳤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화수동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산선이 있던 골목에 어슬렁거렸다.
산선의 노동자교회 자리는 이제 ‘일꾼교회’와 ‘사회복지선교회’로 바뀌었다. 현재 이 교회는 집회 사진과 보고문서 등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자료를 30여 박스 가량 소장하고 있다. 또한 동일방직 여공들이 피신해 있던 지하방 등 민주화 운동의 흔적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꼭 그곳에 태어나 자라야만 그곳을 잘 아는 것 아니다. ‘노동의 기억 도시의 추억, 공장’은 프로필만 봐서는 별 연고가 없는 듯한 저자가 인천 지역의 산업체를 두루 기행하며 취재하듯 구성했다.
1부 ‘인천, 공장지대의 삶’에서는 부평지역과 서구지역 그리고 남동공단 지역의 공장들과 관련한 이야기를 서술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인천의 공장지대는 원래 동구지역부터 시작했다. 일제의 병참 군수기지가 생기면서 농촌마을 부평에 공장이 들어섰고 이후 매립지 남동지역에 공단이 들어섰다. 서구의 공장은 책에서 얘기한대로 한참 후에 정유업체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선 것이다. 인천공장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동구지역을 1부에서 그냥 넘어 가기에 2부를 기대했다.
2부 ‘공장의 기억과 기록’에서는 기대한 대로 동구지역의 공장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그 ‘기억’이 너무 멀리 갔다. 타임머신의 시간 세팅이 너무 ‘롱롱 어고우’다. 일제강점기의 성냥공장, 양조장까지 가버렸다. 물론 이 공장들도 그 옛날 인천을 대표하는 공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희미할 뿐 처절하지는 않다.
3부 ‘오늘의 공장 내일의 인천’은 미래로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공장을 거론했다기보다는 송도국제도시를 묘사했다. 물론 송도에도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미래형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의 인천공장으로 얘기하기는 무리가 있고 더욱이 그곳을 내일의 인천으로 표현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다. 송도국제도시 내 공장지대는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공장을 노동의 기억으로 보든 도시의 추억으로 보든 그건 독자의 몫이다. 나는 그냥 어린 시절 태극기 흔들며 대통령이 탄 시커먼 리무진을 맞이했던 추억으로 인천공장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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