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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진하게 우려낸, 뜨끈한 국수 한 그릇 어때요?

2014-03-05 2014년 3월호

역사 진하게 우려낸,

뜨끈한 국수 한 그릇 어때요?


격동의 역사가 국수 한 그릇에 녹아 있다. 국수를 치대고 뽑고 삶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한민족의 굴곡진 삶과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짜장면과 쫄면의 고향, 칼국수와 냉면 거리가 있는 곳. 인천은 1883년 개항기에 중국 조계지가 자리 잡고 1935년 우리나라 최초로 밀가루 공장이 들어서면서 고유한 면(麵) 요리가 발달해왔다. ‘후루룩’ 맛있게 한 그릇 뚝딱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구불구불 기나 긴 국수 가락을 따라 가면, 굴곡진 역사부터 우리 삶 가까이 존재하는 추억의 한 부분까지 찬찬히 음미할 수 있다.

글 정경숙 본지편집위원   사진 유창호 자유사진가




춘장 향 짙게 배인, 한 그릇
인천은 깊다. 도시 곳곳에 우리나라 개화기와 근대화를 이끌어 온 역사가 묵묵히 배어있다. 1883년 1월 인천 바다가 열리면서 가까이 있는 중국 산둥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국민음식 짜장면은 여기서 시작했다. 고기와 춘장을 한데 볶아 버무린 국수는 중국에서도 오직 산둥에서만 먹던 음식이었다. 산둥 출신 중국 상인들은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을 상대로 그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여기에 양파와 당근을 가미하고 춘장에 물을 타 연하게 풀어 우리 입맛에 맞추면서, 한국식 짜장면이 탄생했다.
짜장면을 처음으로 식탁에 올린 곳은 ‘공화춘’이다. 1912년 ‘공화국 원년의 봄’을 맞는다는 의미로 문을 연 공화춘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미식가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공화춘은 1983년 간판을 내리고 시간의 먼지 속에 묻혔지만 2년 전,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영업을 개시했다.
요리집 공화춘의 맥은 끊겼지만 그 고유한 맛과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손덕준(화교협회부회장·58)씨는 공화춘 주방장 출신 아버지에게서 가업을 이어받아 차이나타운에서 요리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산둥에서 70여 년 음식을 만들어 온 할아버지로부터 손맛을 전수받았다. 대륙 건너 세대 건너 온 비법이니, 그 맛이 깊고 풍부할 밖에. 가을에 담궈 햇빛에 발효시켜 일 년 내내 숙성시킨 춘장과 부드러운 면발이 어우러져 입 안으로 술술 넘어간다. 원조 짜장면은 역시 다르다.



백령도 메밀 향 가득 담긴, 한 그릇
6·25 전쟁 속에서도 인천은 역사 한가운데 있었다. 전쟁으로 오도가도 못하고 인천에 남은 이북 사람들 중에는, 황해도가 고향인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북녘에서 먹던 냉면도 함께 흘러들어 왔다.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에는 황해도 해주식 냉면이 널리 퍼져있다. 정약용도 즐겼다는 해주냉면 맛은 평양냉면, 함흥냉면에 버금가는 진미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백령도는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여 메밀농사를 많이 지었다. 섬사람들은 그 메밀로 가루를 내 반죽해 면을 만들고 육수에 간장 대신 까나리 액젓으로 맛을 내, 이북식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고유한 맛을 내는 백령도식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백령도가 고향인 변신묵(78) 할아버지는 섬에서 냉면을 팔다 1977년 주안으로 와 40여 년째 냉면집을 하고 있다. 아들 삼형제와 며느리 셋이 오순도순 꾸려 가는 ‘변가네 옹진냉면’은 인천에서 맛집으로 꽤나 이름이 높다.
“나 어릴 때 백령도에서는 겨울이면 다들 냉면을 먹었어. 당시 유명한 냉면집이 있었냐고? 그런 게 어딨어. 냉면이라면 집집마다 다 한 솜씨했는데.”
곡물은 갓 갈거나 도정했을 때 최고의 맛을 낸다. 이 집 냉면은 메밀을 그때그때 빻아서 반죽해 면을 만들어 구수하고 달큰한 메밀 향이 살아 있다. 여기에 한우 뼈를 하루 종일 끓여 육수를 내 맛이 깊고 풍부하다. 부드럽게 감기는 향기로운 메밀 면과 구수한 육수가 어우러져 입 안 가득 번진다. 백령도 추운 겨울 밤, 뜨끈한 구들장 아래서 후루룩 마시던 냉면이, 이 맛이었으리라.



질곡의 역사 담담히 품은, 한 그릇
60여 년 분단의 역사를 지나 온 냉면집이 또 있다. 70여 년 전통의 평양냉면집 경인면옥이다. 평안도가 고향인 고 임금옥 할머니는 1944년 광복 이후 서울로 내려와 종로에서 평양냉면집을 하다 인천으로 터를 넓혔다. 당시 가장 번화한 중구 신포동에서 경인식당을 인수해 냉면을 팔았는데, 서울과 달리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다소 슴슴한 육수 맛이 인천사람 입맛에는 생소하게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이 끝나고 인천으로 온 이북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냉면집은 북새통을 이뤘다.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경인면옥에서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이다.
경인면옥의 대를 잇고 있는 함원봉(72) 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육수를 손수 우려낸다. 소고기 설깃살을 6시간 이상 우려낸 육수는 깊으면서도 맑고 고요한 맛으로 미각을 일깨운다. 그 비법은 함께 경인면옥을 꾸려 가고 있는 아들 함종욱씨(46)조차 모른다.
“저희 집 냉면을 드시는 손님들은 ‘처음 먹을 땐 긴가민가하고, 두 번째 먹으면 맛을 알게 되고, 세 번째 먹으면 육수의 참맛을 알게 된다.’고들 하세요.”
평안도에서 서울 종로, 인천으로 삼대째 이어 온 손맛은, 갸웃하다가도 한번 맛들면 자기 전에도 번뜩 생각나 다음날 찾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세상에 없던, 한 그릇
1950년대 6·25전쟁이 끝나고 인천의 공장들이 다시 움직이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노동자들에게 국수는 부담 없이 허기를 채우는 한 끼 식사로 딱 이었다. 귀한 소고기로 육수를 낼 수 없으니 갖가지 재료에 고추장 양념으로 맛을 내고, 세숫대야처럼 생긴 큰 그릇에 푸짐하게 냉면을 담아 팔았다. 인천출신 ‘화평동 냉면’은 그렇게 태어났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화평동냉면 골목 일대는 1980년대 초 인근 화수시장에서 작은 냉면집을 운영하던 상인들이 하나둘 가게를 열면서 생겨났다. 인근 대성목재, 동일방직, 인천제철 그리고 인천항 근로자들이 작업복을 입은 채로 허름한 냉면집을 찾았다. 한창 때는 사람들이 새벽 동틀 무렵 가게 앞에서 문 열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골목 양쪽으로 20여 곳이나 있던 냉면집은 이제 10여 곳만 남았다. 이마저도 곧 불어 닥칠 재개발 바람 앞에 위태롭게 놓여있다.
세상에 없던 냉면을 낳은 인천은, 세상에 없던 또 다른 면을 탄생시켰다. 1970년대 초 중구 경동에 있는 국수공장 ‘광신제면’의 장보성(84) 할머니는 밀려드는 주문량에 그만 면발을 뽑는 사출기의 체를 잘못 끼우고 말았다. 거기서 나온 굵고 질긴 냉면 면발을 버리기 아까워 이웃한 분식집 ‘맛나당’에 선심을 썼다. 그 주인은 고민 끝에 면을 야채와 고추장으로 새콤달콤하게 버무렸다. 씹어도 씹어도 쫄깃쫄깃한 식감이 꽤 괜찮아 너도나도 찾았다. 이것이 바로 쫄면. 이후 맛나당은 간판을 내렸지만, 그 무렵 쫄면을 함께 판 ‘신포 우리만두 신포동점’은 지금도 자리를 지키며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마음까지 뜨끈해지는 칼칼한, 한 그릇
쫄면의 고향 신포동은 한때 칼국수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 아이들에게 신포시장 뒤편은 ‘칼집’ 혹은 ‘칼레스토랑’ 골목으로 통했다. 주머니 가볍던 학생들은 이 골목에서 200원, 300원하는 칼국수로 마음까지 든든히 채웠다. 당시 유행하던 홍콩 누와르 영화를 틀어 주기도 했는데, 영화 한 편을 온전히 보기 위해 친구들과 동전을 모아 국수 한 그릇 더 시켜 먹기도 했다. 
‘골목집’은 36년 전 신포동 칼국수골목에 가장 먼저 터를 잡았다. 장기선(67) 할머니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만해도 가정집이 모인 평범한 골목이었는데, 할머니 칼국수가 대박나자 10여 가게가 모여들어 성업을 이뤘다. 여기서 칼국수집을 하면 3년 안에 집 한 채 산다고도 했다. 지금은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단 두 집만 남았다.
“까만 교복 입은 애들이 바글바글 모였어. 주말이면 100여 그릇을 팔았으니까. 2층 짜리 방 안이 아이들로 꽉 찼는데, 애들이 벗어놓았다 잃어버린 나이키, 프로스펙스 신발을 물어주느라 아주 혼났었어.”
300원짜리 칼국수를 팔고 몇 십 배는 더 비싼 신발을 물어줘야 했으니 손해 보는 장사. 그래도 할머니는 그때가, 그 까까머리 아이들이 그립다. 튀김 가루 잔뜩 들어간 신포동 칼레스토랑표 칼국수를 후후 불어 입 안에 머금는다. 고소하고 진한 추억의 맛이 가슴 깊은 곳까지 후끈 퍼져 나간다.


칼국수하면 또 용동을 빼놓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는 기생집과 요정이, 1970년대는 저렴한 선술집이 몰려 있어 흥청거린 이 동네는 1980년대 칼국수 골목으로 번성했다. 술 마신 다음날 속풀이로 값싸고 시원한 바지락 국물만한 게 있으랴.
용동 칼국수거리의 터줏대감은 ‘초가집’이다. 신경현(81) 할머니는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솜씨로 한자리에서 58년 째 국수를 삶고 있다. 시어머니는 한국전쟁 후 용동으로 와 기생들에게 녹두부침개를 만들어 팔다 요정이 하나둘 없어지자 칼국수집을 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설 만큼 장사가 잘 돼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기와집이 지금의 4층 집이 되었다.
긴 역사를 지나 온 손칼국수 맛은 과연 어떨까. 콩가루를 넣고 반죽을 빚어 잘 숙성시켜 만든 면은 고소하고 쫄깃하다. 그 뽀얀 면발을 바지락과 갖은 채소를 넣고 끓인 국물에 우르르 끓여 먹는 맛이란.
현재 이 골목은 ‘칼국수거리’라는 팻말이 무색할 만큼 단 네 집만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아, 이 골목이 국수 냄새로 진동하던 때가 있었던가. 역사는 계속 살아 숨 쉬어야 한다.




기나 긴 국수 가락 따라,
역사는 흐른다

1910년대 일본은 항구가 가까운 인천에 공장을 짓고 한반도 진출의 야욕을 품었다. 일본차량제작소, 이화금속, 동양방적 등 일본에 본사를 둔 회사들이 인천에 터를 잡았다. 그 가운데 일본제분은 1935년 지금의 만석동인 무네미 매립지 위에 공장을 세웠다. 밀가루 공장이 생기자 자연스레 그 옆에 국수 공장이 들어서고 시간이 흐르면서 쫄면, 짜장면, 냉면 등 면 요리가 다양하게 발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밀가루 공장인 일본제분은 1945년 광복 이후 대한제분이라는 이름을 달고 지금도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인천에는 오래된 밀가루 공장과 함께 국수를 일일이 널어 말리는 재래식 국수공장도 있다. 권오성(52)씨는 용현시장에서 15년 째 국수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충남 은산에서 17살 때부터 국수를 만들었다. 가업을 이어 현재 삼 형제가 구월동과 김포 그리고 이곳 용현시장에서 국수공장을 운영한다. 전국에서도 재래식 국수공장은 많지 않다. 밀가루 반죽을 30번 밀고 겹치고 밀고 겹치기를 반복하는 압연 과정 끝에 나온 국수는 한 자락 한 자락 올곧은 자태를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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