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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동, 화개동 마루턱, 뾰족탑…100년 전 백범 ‘탈옥루트’ 밟다

2014-03-05 2014년 3월호

용동, 화개동 마루턱, 뾰족탑…
100년 전 백범 ‘탈옥루트’ 밟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항일운동을 벌여 온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냈고, 독립운동과 관련해 일제 치하에서 많은 옥고를 치렀다. 김구 선생은 인천에서 두 번의 감옥생활을 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김구 선생에게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이자 애국청년 김창수를 독립운동가 김구로 바꾸어 민족의 지도자로 이끈 고장이기도 하다. 3·1절을 맞아 인천에 남아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과 탈옥의 루트를 장회숙 인천도시지원디자인연구소 공동대표와 함께 돌아봤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1896년 ‘치하포사건’으로 인천서 2년간 옥살이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세가 되던 1896년이다. 일본 군사 간첩을 죽인 ‘치하포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중구 내동에 있던 감리서 옥사에 갇혔고, 여기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 선생은 1898년 3월 9일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옥한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인천의 지리를 잘 모르는 상태였지만 용동 마루턱, 천주교당 뾰족집, 화개동 마루턱, 북성고지 모래밭, 부평 등의 지명을 통해 자신의 탈옥 경로를 남겼다.
김구 선생이 탈옥해 밤새 헤매던 북성고지 모래밭은 인천역 주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인천역은 바닷가였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기껏 달아난다고 다닌 곳이 감리서 뒤 용동 마루턱이었고, 아침이 밝아오면서 천주교당의 뾰족집이 보였다.”고 쓰고 있다. 장회숙 대표는 당시 김구 선생이 본 천주교당 뾰족집은 내리교회가 아니라 지금의 답동성당이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탈출했을 당시엔 내리교회가 없었다. 내리교회는 1901년 건립됐다. 김구 선생은 내동에서 중국인묘지를 거쳐 용동 마루턱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탈출로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았던 으슥한 길을 이용했다.
용동 마루턱은 지금의 기독교병원 부근이다. 용동 큰우물과 고유섭 선생의 생가터를 지나 오르다 보면 기독교병원이 보인다. 여기선 답동성당의 뾰족탑이 시원스레 눈에 들어온다. 장회숙 대표는 당시 김구 선생이 보았던 뾰족탑은 답동성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답동성당은 제물포교회, 프랑스교회로 불렸다.
장회숙 대표는 김구 선생이 용동을 탈출로로 택한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당시 용동은 물상객주집들이 많이 있었고 객주들 중엔 김구 선생을 돕는 사람들이 있어 안전한 탈출로 중 하나였다.”



화개동에서 학익, 문학동 거처 서울로
용동 마루턱을 지난 백범은 율목동을 거쳐 화개동(현재 신흥동) 마루턱에 이른다. 당시 이곳은 꽤나 높은 고지대였다. 당시 그가 다다랐던 화개동 마루턱은 해광사 언덕 주변이다. 해광사 언덕에서는 인천 전경이 한 눈에 내다보인다. 김구 선생은 해광사 언덕배기를 내려와 학익동, 문학동을 지나 부평 만월산을 넘어 서울의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다.
백범은 1911년 안명근 사건과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두 번째로 인천감옥에 투옥된다. 당시 김구 선생은 감옥에 있으면서 인천 축항공사(인천항 제1부두)에 동원돼 노역에 시달리다 1915년에 가출옥한다.
백범은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1946년 지방순회를 할 때 인천을 제일 먼저 찾았다. 강화도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열심히 구명운동을 했던 김주경이 살았던 곳이다. 강화 사람 김주경은 백범에게 탈옥을 권유했고, 전 재산을 털어 구명운동을 벌일 정도로 헌신했다. 이외에도 물상객주 박영문, 안호연 등의 인물들도 사형수였던 김구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애쓴 인물들이어서 백범과 인천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현재 중구 내동 한진아파트 일대의 부지는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의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인천감리서를 설치했던 곳이다. 1895년 3월부터는 이 곳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했다. 인천개항장 재판소는 22살의 김구가 ‘차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옛 인천감리서


김구 선생이 노역을 했던
인천항 제1부두

 

해광사 가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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