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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고택, 오랜 시간 기와에 누워
2014-03-10 2014년 3월호
300년 고택,
오랜 시간 기와에 누워
글 이혜경 인천시 마을공동체지원센터

해마다 봄이 되면 개나리, 산수유가 담장을 넘어 빼꼼히 봄이 왔노라 알려주는 곳이 있다. 원적산 네거리 방향, 즉 가좌동 주민이면 누구나 다 알만한 한국티타늄(현 코스모화학) 쪽으로 가다 보면?중국집 뒤편에 300년 넘은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은 처음 심재갑(현 인하공전 명예교수)씨의 십대조인 고 심한웅(1652~1715년 6월 15일)씨가 지은 마을 최초의 기와집이다. 증 하선 이조참판 겸 지의금부사오위도 총부부총관의 벼슬을 지냈던 고 심한웅씨가 1715년도에 지은 집이다. 그리고 1940년에 이르러서 안채를 헐고 개축하게 되었다. 압록강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서까래와 기둥으로 썼고, 병자호란 때 영흥도에 임경업 장군 사당으로 있던 곳의 기와를 심재갑씨의 아버지인 고 심운섭씨가 세 척의 배로 실어와 기와를 얹었다. 일제시대에는 보호가 안 돼 자연퇴락이 되어가던 중 기와를 가져와서 지붕으로 얹은 것인데 지금 당장 기와 위로 올라가서 마구 뛰어도 부서질 것 같지 않게 튼튼하다. 개수하는 데 자그마치 3년이 걸렸다고 한다. 개성목수들이 못을 전혀 치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엮어서 지은 집이라고 하여 서까래 연결부분을 올려다 보니 과연 그랬다. 개축을 마치고 상량식을 하였는데 기와집으로서는 마을에서 처음 생긴 집이라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모여들어 마을잔치를 성대하게 벌였다고 한다.
300년 된 기와집의 우물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다. 심재갑 님이 청년 나이 18세였던 6·25 전쟁때 가좌동으로 피난민들이 몰리면서 그 당시 기와집에는 20여 가구 이상이 방과 마루, 헛간 할 것 없이 함께 모여 살게 되었고, 피난민들의 식수로서 기와집 우물물은 아주 톡톡한 역할을 해냈다. 사람이 물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으랴. 78년도에 상수도 보급이 한창이던 때 수도를 설치했지만, 여태 우물자리는 얌전히 뚜껑이 덮여진 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바로 그 위에 상현달 같은 사철나무가 반들반들한 윤을 내며 서 있으니, 그 당시의 우물가를 별반 어렵지 않게 눈앞에 떠올릴 수가 있다. 새마을사업이 붐을 이룰 때 관에서는 기와집을 헐고 다시 짓자고도 하고 지붕에 페인트칠이라도 해서 보기 좋게 하자는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심재갑씨는 모두 만류했다. 집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생각했을 테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아궁이 4개에 불을 지펴 집을 보존하는 데, 마당 한구석엔 땔감으로 쓰일 나무가 쌓여 있다. 아무리 고대광실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냄새, 사람의 발자욱 소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 집은 눈에 보이지 않게 무너져 내린다. 지금 300년 된 기와집은 일주일에 한 번씩 따끈한 구들방이 되어 본다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맨발로 마루바닥과 안방, 사랑방을 오가며 기를 전해 주고 두 손으로 어루만지는 만큼이나 할까.
서구에 하나뿐인 300년 된 기와집은 마을의 훌륭한 유산이다. 부디, 사람이 오가는 300년 고택으로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내 가슴에 새긴 한 구절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완벽한 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후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기형도의 詩 ‘겨울. 눈雪. 나무. 숲’ 中
삶은 겨울을 맨 몸으로 통과하는 일, 골목이 시끌하던 도시의 삶도 비어가고 있다. 누가 따뜻한 봄을 이야기할 것인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고 살고 있는 그야말로 ‘동네사람들’이 봄을 만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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