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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음반 틀지 못하게 시내 다방 단속

2014-03-10 2014년 3월호

일본 음반 틀지 못하게
시내 다방 단속


정리 유동현 본지편집장

6·25 전쟁이 끝난 후 상흔이 아물면서 시 행정도 급속히 안정을 찾아갔다. 인천시는 시민들에게 시 정책과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단기 4286년(서기 1953년)부터 단기 4289년(서기 1956년)까지 ‘인천공보(仁川公報)’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어찌 보면 본지 ‘굿모닝인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신문을 보면 당시의 시 정책은 물론 인천의 사회상과 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인천공보’의 기사 원문을 그대로 발췌하되 이해하기 힘든 단어나 문장은 현재 어법에 맞게 고쳐서 매월 이 지면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백반(白飯) 판매에 대한 엄단
전시 생활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 시 사회과에서는 관하 전역에 걸친 각 요정 및 대중식당의 운영업자는 백반 및 떡국을 팔지 못하도록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정초를 맞이해서 이러한 규칙을 어기는 업자들이 종종 발견되는 폐단이 있음으로 각 업자들은 이 점에 특히 유의하여 많은 주의를 요한다고 하며 위반자는 엄벌에 처하리라고 한다. (1953년 1월 24일자)


요식 다방업자 시간 엄수하라
접객업자들의 영업시간을 엄수하라는 것은 취체 당국으로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주의를 환기 시킨 바 있었으나 아직도 관계 당국의 호의를 무시하고 번번이 영업시간을 어기는 무지각한 업자들이 있다. 즉 지난 19일 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도록 영업을 계속하고 있던 시내 용동 담수장(요식업)과 소원다방 업주에 대하여는 법적 조치를 취하였다는 데 이후에도 위반자가 있으면 발각되는 대로 계속 엄중한 처분할 것으로 업자들에게 통고하고 있다.
(1953년 2월 25일자)



시내 399개소 우물 수리 공사
시멘트 1200포는 이미 배부

시내 각처에 산재하는 공동우물은 시민들의 수용량 급수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바 그동안 보수공사를 못하였던 관계로 주변이 어지러워진 곳이 많아 시민들의 공공위생에 극히 우려됨으로 시 건설과에서는 이번 399개소의 공동우물을 수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리공사에 필요한 시멘트는 벌써 지난 20일 1천2백 포대를 각 동에 배부하였다고 하며 각 동에서는 늦어도 1주일 이내에 일제히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1953년 3월 25일자) 



경기도내 우량아 심사
인천 어린이 1,2,3등 입선

지난 19일, 20일 양일에 걸쳐 경기도에서는 각 시·군에서 선발된 우량아 심사를 실시하였다고 하는데 인천시에서는 네 명이 참석하여 심사를 받은 결과 당당히 1, 2, 3등을 모조리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날 영예의 당선을 본 어머니들에게는 경기도지사로부터 표창장과 상품으로 은수저들을 받았다고 하며 내무국장은 당선된 귀여운 어린이들을 정성껏 양육한 어머니들에게 찬사를 하는 한편 국장 애용의 자동차까지 대주어 어린이들을 인천까지 태워다 주었다고 하는데 당선된 어린이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1등=신흥동 3가 18번지 김인자(여) 8개월  2등=숭의동 314번지 박일현(남) 1년20개월  3등=금곡동 59번지 이순석(남) 11개월 (1953년 5월 27일자) 

사용 엄단 일본 음반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랜 일본 음반 소리가 지금도 소위 문화인의 휴식처이며 지식인들의 집결 장소인 다방에서 흘러나온다고? 일본 음반 사용금지에 대하여는 당국으로부터 수차에 거쳐 지시한 바도 있으나 들은 체 만 체 민족적인 도의성을 망각하고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음은 민족의식을 망각한 망동이 아닐 수 없다. 인천시에서는 이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하기 위하여 각 다방 업자에게 통첩을 내어 좀더 자숙하고 민족적인 양심에 입각하여 이후부터는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다. (1953년 6월 24일자)  

송도고교 이전
송도중학교 및 동 고등학교는 피난 이후로 만국공원 언덕 밑에 있는 판자교실에서 수업을하여 오던 바 지난 8월 중순 경의 적산가옥 집단 불하 시에 관재국으로부터 시내 답동 소재 용운사(龍雲寺)를 불하 받아 10월 1일 부로 이전하였다고 하며 이제까지 사용 중이었던 판자교사는 분교로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1953년 10월 7일 자)

해광사에 안치 중인 영현들을 참배하자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멸공 전선에서 적과 용감히 싸우다가 불행히도 흉탄을 받고 다만 불멸의 공훈만을 남기고 조국의 수호신이 된 경기도(당시 인천은 경기도에 속함) 출신 영현 527주는 지난 11월 26일 정오경 축현역(현 동인천역)에 안착하자 재인 각 기관장, 남녀학생 그리고 일반시민이 다수 봉영하는 가운데 무언의 귀향을 하여 영현은 남자 학생들의 품에 굳게 안겨 시내 해광사로 향하여 안치되었다. 인천시에서는 국가의 방패로서 한 몸을 희생한 이들 영현을 참배함으로써 후방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동시에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각 동장들은 솔선수범하는 견지에서 일반 동민에게 주지 철저를 기하고 참배하도록 요망하고 있다. 
(1953년 12월 9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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