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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활자’에 목말라 했습니다”
2014-04-02 2014년 4월호
“시민들은 ‘활자’에
목말라 했습니다”
신문은 오늘에는 뉴스이지만 내일이면 역사다. 인천공보는 비록 시에서 발행한 주간신문이었지만 1950년대 당시 인천시의 정책과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역사책’이다. 당시 시민들은 인천공보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았고 직접 투고를 하면서 여론에 호소하기도 했다. 5년 넘게 ‘인천공보’의 데스크 업무를 맡았던 이준규 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여러 해 ‘굿모닝인천’의 애독자였다. 잠시 차 한잔을 마시며 당시 발간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편집장

지난 2월 초,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 ‘굿모닝인천’ 편집장이십니까? 저는… 인천공보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본지는 올 2월호부터 ‘인천공보(仁川公報)로 본 60년 전 인천’이란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1950년대 인천시 정책은 물론 지역의 시회상과 생활상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코너다. ‘인천공보’는 아직 전선(戰線)의 포성이 멈추지 않았던 1953년 1월 10일 당시 표양문 인천시장을 발행인으로 부시장 최병환을 편집인으로 해서 창간한 인천시 기관지였다. 실제적인 편집 업무는 문인이자 언론인이었던 최성연 선생이 맡았다. 그는 후에 ‘양관역정’이란 책을 발간한 향토사학자이기도 하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제작되었다. 시민들에게 시정을 홍보하는 것 외에도 정보에 목말라했던 시민들에게 일반기사를 제공하고 문예작품 등을 실으면서 매호 발간될 때 마다 많은 호응을 얻었다. 창간호에 실린 시장의 창간사 일부를 보자.
‘인천공보를 간행함은 시 행정의 내용을 공표하고 전달하는 한편 시민들의 중성(衆聲)과 여망을 취급할 것은 물론이요, 시의회의 의사 기록과 의원 제씨의 활동상황이며 그들의 의견을 발표하여 시민제위가 잘 알도록 할 것이며 시를 운영하는 공무원들의 상호간의 지식을 계몽하고 친목을 도모하여 사무의 능률을 향상시키고자 함에도 또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천시는 인천공보 발간에 앞서 8·15 광복 후 미군정 때부터 정부수립 시까지 ‘주간인천’을 약 100호 가깝게 발행한 적이 있다. 이 주간인천은 후에 고일(高逸)이 주필로 활동한 ‘주간인천’과 제호는 같지만 발행주체는 다르다.
지난달 18일 오후, 전화의 주인공이 시청 굿모닝인천 사무실을 찾아왔다. 중절모를 쓴 건강한 모습의 이준규(李俊珪·83) 어르신이 밝은 웃음을 머금고 방문했다.
“ ‘굿모닝인천’을 읽다가 ‘인천공보’ 제호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만든 나조차 이제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그 신문의 기사를 다시 보게 돼 감개무량했습니다.”
이 선생은 창간 후 최성연, 박치원 편집장에 이어서 세 번째 데스크를 맡았다. 1961년 인천공보가 폐간될 때 마지막호 편집을 마친 장본인이다. 1931년생인 그는 서울에 살다가 6·25 전쟁 후 인천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언론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김은하 전 국회부의장이 인천지사장으로 있던 동양통신의 편집기자로 일하면서부터다. 그는 1954년 12월 10일부터 인천공보로 자리를 옮겨 일하게 된다.
‘그때 신문을 제작하던 형편이 어땠습니까’라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갖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 창간되자마자 야당 의원이 주류였던 시의회에서 끊임없이 ‘태클’이 들어왔다. “성화가 대단했어요. 시장 사진 크게 게재하거나 제목이 맘에 들지 않으면 난리가 나요, 회기 때마다 예산 삭감 운운하고….”
얼마나 압박이 심했으면 ‘인천공보’ 편집팀이 속한 시청 공보계에 카메라 한 대가 없을 정도였다. 수도과에 있는 사진기를 사정하다시피 해서 빌려 쓰거나 수도과 기사를 모셔다 현장을 촬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사진을 게재하려면 동판을 떠야했는데 인천에는 그 시설이 없었다. 결국 사진 한 장 때문에 아침 일찍 경인선에 몸을 싣고 서울에서 작업해 가져와야 했다. 그러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
비록 기관지였지만 매주 3천부씩 발행하는 인천공보의 매체 파워는 대단했다. 당시 시중에서 발행하는 신문들이 1천부 가량 발행할 때였다. 인쇄는 외주 업체에 맡겼는데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문선공이 활자를 일일이 골라서 조판을 했다. 간혹 없는 글자가 나오면 기사 내용을 바꾸거나 꼭 써야한다면 서울 가서 급히 활자를 사와야 했다. 급하면 도장집에 가서 한자 목각을 파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제목도 맘대로 붙이지 못했다.
인쇄는 로울러를 밀어서 했고 잘 밀리라고 로울러에 아교와 설탕을 입혀 사용하곤 했는데 밤새 쥐가 그것을 갉아먹어 발간 시간을 맞추느라 발을 동동 구르던 때도 있었다. 사람도 쥐도 모두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신문 제작 예산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어 나중에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다 떠나고 홀로 인천공보를 발간했다.
1961년 5·16이 일어나면서 ‘인천공보’는 폐간된다. 곧 ‘재건인천’이란 제호로 다시 복간이 되지만 군복무 미필자였던 이 선생은 옷을 벗게 된다. 1년이 지난 후 일반직 공무원으로 전환되면서 공직의 길을 걷게 된다. 동사무장으로 시작해 시청 계장, 구청 과장을 거쳐 1992년 인천시민회관 관장으로 정년퇴임한다. 현재 이준규 선생은 수필가와 수맥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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