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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히는 것이 어찌 낙엽뿐이랴
밟히는 것이 어찌 낙엽뿐이랴
색색별천지(色色別天地). 철따라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봄에는 들판이 싱싱하고 여름에는 바다가 제빛을 찾는다. 가을엔 하늘이 깊다. 이즈음 유난히 하늘이 깊은 강화도에 가면 붉은 단풍잎에 눈이 시리고 떨어지는 낙엽에 마음이 저려온다. 강화의 가을은 슬픈 가을이다.
글-유동현 (본지 편집장) | 사진-김성환 (자유사진가)
# 잃어버린 시간의 주름
가을이 남녘으로 내려가면서 혼신의 힘으로 색깔을 쏟아내고 있다. 도시의 하늘을 벗어난 늦가을 햇빛은 강화도 들판의 곡식과 잡풀, 과일들에게 마지막 남은 젖을 물리며 서서히 생을 마감하고 있다.
강화읍 북산(北山)에도 늦가을이 걸렸다. 고려왕의 피난터였던 고려궁의 돌담을 끼고 오르는 900여 미터의 고갯길에 가을이 수북이 쌓여가고 있다. 강화산성 북문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옷깃을 한껏 세우고 분위기 잡으며 늦가을의 정취에 푹 젖어 볼 수 있는 한적한 오솔길이다.
이 길은 꽃피는 춘삼월에는 새하얀 꽃비가 내리는 환상의 벚꽃터널이다. 아름다운 것은 사라질 때도 아름답다. 하얀 꽃 다 털어내고 짙푸른 녹음으로 한여름을 보낸 후 이제 알록달록한 옷으로 거푸 갈아입고 황금빛 이파리마저 털어내고 있다. 자동차가 지날 때 마다 낙엽들은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휘날린다. 스산한 기운도 함께 소용돌이 친다.
오르막 낙엽길을 따라 끝까지 오르면 진송루(鎭松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북문이 나온다. 북문은 대몽항쟁을 위해 쌓은 북산에 세운 강화산성의 북쪽 문이다. 아담한 성문 양 옆에 마치 수문장처럼 빨간 단풍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 한장의 그림엽서를 만들어 낸다.
북산은 송악산이라고 일컬어진다. 몽골의 말발굽을 피해 강화도로 건너온 고려왕 고종은 개경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궁궐을 안고 있는 북산을 송악산이라 불렀다. 그 송악산에 어김없이 서러운 가을이 다시 찾아왔다. 몇백년이 지나도록 저기 저, 나무에 얼마나 많은 고려인들의 서러운 눈길들이 머물다 갔는지… 마음 속에 고요히 여울지는 ‘시간의 주름’을 느껴본다. 슬픈 고려의 역사를 품고 있어서 그런지 이곳은 화려한 봄보다 스산한 가을에 찾는 것이 더 좋다.
# 하늘이 주신 약수터
성문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본다. 북한 개풍군의 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고려 고종도 이 곳에 서서 고향 땅을 그리워했겠지. 지금은 6·25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이곳에 와서 고향 산하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단다. 몇 년 전만 해도 북한의 대남방송이 쩌렁쩌렁 울렸을 만큼 저 땅과 이 땅은 한발치일뿐이다.
성문을 지나 성 밖 마을로 나선다. 미끈하게 뻗은 수십 그루의 은행나무가 사열하듯 길게 도열해 있다. 얼마나 많은 은행잎을 털어냈는지 급내리막 길은 온통 노란색으로 이어진다. 그 밑으로 성밖 마을이 한가하게 펼쳐진다. 추수를 끝낸 황량한 들판, 까치밥 하나 달랑 매달려 있는 감나무, 들깨를 털며 막바지 가을걷이를 하는 노부부의 모습 등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연출된다.
마을에는 유명한 약수터가 있다. 물맛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오읍(五泣) 약수터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강화도에 있는 명소치고 전설 하나 없는 것이 있을까. 이 약수터에도 애절한 옛이야기 하나가 전해 온다.
피난 온 고려인들은 먼저 산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오랫동안 날이 가물어 갈증에 심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우제를 올렸고 마침내 벼락 하나가 성벽 근처로 떨어졌다. 그곳에 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깨져 있고 거기서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고향을 잃은 고려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고 간절했는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이 울고, 임금이 울고 또한 백성이 울었다하여 ‘다섯 오’에 ‘울 읍’ 자를 써 오읍약수라 불렀다.
북문에서 약수터 까지는 500보 정도로 가깝다. 짧지만 이 길은 약간 굽어 있고 유난히 낙엽이 많이 쌓여 있어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 볼 수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밟히는 것은 낙엽뿐만이 아니다. 이 가을,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애절한 마음도 낙엽과 함께 깊게 밟힌다.
찾아가는 길_ 강화읍 고려당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00m 정도 오르면 고려궁지 주차장이 나온다. 거기서 궁궐 담을 끼고 오르면 북문까지 갈 수 있다.
한걸음 더
강화산성 북문 인근에는 역사를 품고 있는 유적지들이 몰려 있다. 10분 거리 이내에 있는 이곳들만 둘러봐도 5천년 우리 역사의 한줄기는 꿰뚫어 볼 수 있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철종이 왕이 되기 전 ‘강화도령’으로 지냈던 일반 기와집이다. 김상용순의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남문 화약고에서 자결한 충신 김상용을 기린 비석이다.
고려궁지는 몽고의 침입때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처하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맞서 항쟁하였다.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 건물 명위헌과 이방청 그리고 강화동종이 있다.
강화성공회 건물은 1900년에 지어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공회 예배당이다. 외부는 한옥식 건물로 지어 올려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내부는 전형적인 바실리카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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