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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서 피어나는 문자예술서각
나무에서 피어나는 문자예술서각
하얀 화선지 위에 검은 먹으로 글자를 써 내려가던 사람들은 평면적인 예술 너머의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나무 위에 붓이 아니라 칼과 망치, 끌을 이용해 글자를 입체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
글·신은주 (인화여고 국어교사) | 사진·김정식 (자유사진가)
부평역 부근에 위치한 한국조형서각연구소에 들어섰을 때, 백초 박민수 선생과 문하생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연구소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각 작품이었다. 다양한 빛깔의 나무위에서는 조형적인 글자들이 자기만의 향기를 뿜어 내고, 작업실에서는 회원들이 나무 위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목재소에서 가져 온 매끄러운 나무들은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날을 기다리며 한 쪽에 쌓여 있었다.
백초 선생은 서각의 기초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서각이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글서(書)’자에 ‘새길 각(刻)’자이니 글, 즉 문자를 새긴다는 뜻이 된다. 나무에 새기는 방법으로는 음각, 양각, 음·양각, 혼합각이 있다.
서각은 예술성보다는 기록 보존을 위한 수단, 실용적인 목적에서 제작되어 왔는데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 전통서각의 현대화에 선구적으로 뛰어든 이들 덕분에 예술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서예도 병행하고 있지만 지금은 현대서각이 지닌 미술품으로서의 조형미를 창조해내는 데 더 매력을 느껴서 현대서각 작품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벽에 걸려 있지 않고 바닥에 세워져 있는 작품에 대해서 물어보니 ‘환조서각’으로 작품을 세워놓고 사방을 다 볼 수 있는 입체서각 작품이라고 한다. 완성된 글씨에 물감을 입혀서 조형미를 살리는 데, 주로 사용되는 물감은 아크릴, 서양화, 동양화 물감이다.
서각에 새겨져 있는 전각을 가리키면서 서각은 전각, 현판, 판화도 포함한 종합미술로, 서각을 하기 위해서는 서예가 기본인데 조형미가 뛰어난 전서체가 많이 쓰인다고 했다.
우리나라 나무로는 느티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주목, 박달나무가 쓰이고, 수입목으로는 알마시카, 마디카가 적당하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나무는 휘는 성질 때문에 서각에서는 환영 받지 못한다. 느티나무는 딱딱해서 숙련된 사람들에게 어울리고, 은행나무는 결이 곱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색깔을 잘 먹어서 많이 사용된다.
현재 백초 선생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은 30명 정도. 10여명이 작업실로 나와서 정기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대부분 한국서각협회 회원으로, 매년 전시회를 열어 일반인들에게 서각의 세계를 알린 덕분에 회원이 꾸준히 늘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서각협회 수석부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연수문화원, 인사동으로 출강을 나가면서 서각의 예술미를 사람들이 만나도록 하고 있다.
편안한 글씨체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 한 점이 눈에 들어 왔다. ‘따스한 마음은 세상의 가슴을 적시는 샘물입니다.’라는 서각 작품의 주인공 서양희 씨는 자녀의 학교에서 평생교육으로 잠깐 서각을 접한 인연으로, 서각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서각 작품을 하면서 작품을 창작하는 일만 하지 않고, 마음이 일치하는 사람끼리 매달 목요일에 한 번씩 만나 한국서각아카데미를 열어 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벽에 걸어 놓는 고급예술 작품으로서의 서각뿐만 아니라 생활속에 쓰이는 것들 즉 다상, 시계 등에 접목을 해서 대중에게 서각예술을 널리 알리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서각의 대중화를 꿈꾸면서 자기 만족의 예술에만 갇혀 있지 않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6년 째 서각을 하고 있는 안정자씨는 원래 백초 선생과 서예로 인연을 맺었는데 서각 전시회에서 서각 작품에 매료된 후 서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서예가 주는 아름다움도 좋지만 먹색에 변화를 주어 색다른 것을 원하던 마음을 서각이 채워주었고, 서각 작품은 볼수록 싫증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서예는 한 번 틀리면 수정이 불가능한데 서각은 약간 틀려도 다듬기를 통해서 보완이 되는 포용성이 있다는 점도 서각 작품의 매력이라고 했다.
그녀는 서각은 보는 각도에 따라 글자의 아름다움을 다르게 느낄 수 있으므로, 글자의 의미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작품자체를 감상해야 서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작품감상에 대한 얘기도 들려주었다. 기초과정 1년을 거치면 망치와 칼을 이용해서 글자에 각을 세우는 것이 어렵지 않고, 도중에 그만두지 않는 마음까지도 길러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창작을 향한 인간의 욕구가 멈추지 않는 한 ‘예술의 변신에는 마침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 본 자연의 예술 작품 가을하늘이 오늘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문의 : 한국조형서각연구소 524-6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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