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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청에서 만난‘미스 사이공’ 위엔 칸 링
인천시청에서 만난
‘미스 사이공’ 위엔 칸 링
글-김 류 (시인) | 사진-김보섭 (자유사진가)
먼저 그녀가 ‘미스 사이공’과는 관련이 전혀 없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위엔 칸 링 양(孃)이 월남 여성이니까 그 유명한 뮤지컬과 언뜻 연상이 되어서 그냥 멋대로 제목에 써 버린 것이다. 독자들은 이게 무슨 짓인가, 나무랄지도 모르지만 아오자이를 입은 채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는 이 고운 월남 처녀를 보는 순간 ‘미스 사이공’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고 이 뮤지컬을 보았다거나 아니면 관심이나마 가졌었던 것도 아니다. 서울에서 나오는 한 일간지 광고에서 얼핏 헬기 그림과 함께 타이틀을 한번 읽어 본 정도가 미스 사이공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총계이다. 그러니 내용도 알 까닭이 없다. 위엔 칸 링 양은 하다못해 사이공 출신도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미스 사이공’으로 부르고 싶은 것이다. 또 달리 부를 만한 적당한 호칭도 없다.
인천시청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은 좀 더웠다. 지긋지긋하게 땀을 흘린 데다가 그날따라 오전부터 무언가에 심사가 좀 뒤틀어져 있었던 까닭에 잔뜩 찌푸린 얼굴로 편집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짐짓, 그녀가 별로 눈에 들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특히 시청으로 향해 가면서 이미 김이 빠진 것은 영어 때문이었다. 영어를 써야 하는데 혀가 굳어 버리는 그 빈약한 실력이라니!
그러다 문득, 그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의자에 앉아 도둑 눈짓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훔쳐보고, 그만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여름 나라들’에 대한 편견과 틀려 있던 마음이 슬그머니 풀어졌던 것이다. 아이구, 콧날이 이처럼 오똑하게 생긴 열대 몬순 나라 처녀가 있었던가. 그냥 이러고 있을 수만 없는 일이다.
“훼어 아 유 후럼?”
“비에트남.”
이런 이런! 고작 입을 열어 떠듬거려 낸 말이 그만 다 알고 있는 묻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사실을 묻고 만 것이다. 이 기가 막힌 질문에 그녀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비에트남’을 정확히 발음했고, 답답하다는 듯 사진을 찍는 작가가 옆에서 재차 물어 주어서 그녀가 하이퐁 시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하이퐁이라. 우리 인천시가 국제 자매 결연을 맺은 도시의 하나가 월남의 제3 도시이면서 북부 월남 최대의 항구인 이 하이퐁 시이고, 그래서 그녀가 하이퐁 시 공무원 신분으로 인천에 와 있는 것이다. 그녀가 출근하는 사무실은 시 국제협력관실. 우리로서는 나라와 인천을 홍보하는 것이고, 그녀의 임무는 자기 나라보다 앞선 우리를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인천에 체재하는 기간은 6개월. 4월에 왔다니까, 10월이면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그녀의 역할은 한국과 월남 두 나라 사이의 민간 외교관으로서 가교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일 비 백 쑨.”
“오, 사운즈 굿.”
그녀가 이내 다시 올 거라는 말에, 좋다는, 그게 기쁘다는 의미로 내뱉은 이 말이 맞는지 어쩐지.
거기 여성으로는 키가 비교적 큰 편인데다가, 아오자이 속에 군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러나 아무래도 좀 한국 여자보다는 ‘약(弱) S 라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가녀린 몸매, 선명한 쌍꺼풀, 밝은 미소, 아, 그리고 양쪽 귀에 흰 풀꽃처럼 매달려 찰랑거리는 귀고리 따위, 이 매력적인 것들이 마침내 머리를 어질거리게 하고 입 안을 몹시 메마르게 하는 것이다.
“유, 미스 비에트남!”
“노우.”
“미스 사이공.”
“노우, 미스 하이퐁 인 인천.”
이 생글거리는 남국 여자의 표정 앞에 말을 잃는다. 검고 맑은 눈동자, 남쪽 나라 십자성…. 불현듯 또 1992년 장 자끄 아노 감독이 만든 영화 ‘연인’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 였을 것이다. 불란서가 지배하고 있던 1920년대의 월남. 육체에 탐닉하던 중국인 청년과 불란서 소녀의 애정. the Young Girl 역을 맡은 제인 마치와 중국인 부자 the Chinaman 역의 양가휘. 그러나 이것도 틀린 연상이다. 영화 속 ‘소녀’는 불란서 소녀이고 위엔 칸 링 양은 월남 처녀가 아닌가. 그리고 하이퐁에서 대학을 나온 인텔리 여성이 다르다. 더구나 영화의 끝은, 파리의 다락방 창문 밖으로 눈이 펑펑 쏟아지는 장면이다.
이런 혼자 속생각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얼버무리면서 슬며시 묻는다.
“헤브 유 에니 훼이버릿 포엠즈?”
말이 막히거나, 여자가 매우 매혹적일 때도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아는 독자들은 알겠지. 애인과 잠시 헤어졌다는, 또 그것이 생각보다 길게 갈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굿 뉴스라고 농담을 던지고 끝내 ‘리메인 싱글’ 어쩌구 하는 영판 형편없는 콩글리쉬로 결혼을 하지 말라는 뜻을 뱉어 놓자, 그녀가 알아들었는지 ‘오 마이 갓’을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내 이쪽의 주착을 웃음으로 누그리는데, 그 모습이 아주 귀엽고 대견하다.
“노우, 밧….”
그러면서 그녀는 이렇게 적는 것이다.
‘Thuyen va bien ctat nuoc, mua xuan nho nho…’
도무지 제대로 된 말 같지 않은, 무슨 암호인지 신호인지, 영어인지, 불어인지 알 수 없는 글을 그녀가 종이 위에 적어 보여 주는 것이다. 아마 자기네 나라 시인 것 같다. 솔직히 그녀는 시에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조금 실망스럽지만, 그러나 이 흑장미 같은 여자에게 시를 아니 보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월남으로 돌아가면 편지를 쓰기로 하고 그때 아름다운 우리 시를 한 편 적어 보내리라.
“인천 사람….”
떠듬거리는 우리말로 시작한 한국인, 우리 인천인에 대한 소회를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개성적이고, 격정적이다, 그리고 근면하다, 특히 자기 일에 아주 전문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 음식처럼 웜 핫(warm hot)하다’ 맞는 말일까.
시청 국제협력관실에서 조금 낯설게 보냈지만 6개월은 아주 재미있는 나날이었다. 퇴근해 돌아와서는 한 주일에 세 번 한국어 교습학원에 다니거나 TV로 한국어를 연습하는 것이 일과. 어떤 날은 친한 한국인 친구와 어울려 노래방에도 가고, 거리를 산보하기도 한다. 여기 와서 배운 우리 노래는 ‘아리랑’ ‘사랑해 당신을’ 같은 것들. 김치를 비롯해 냉면, 삼겹살, 닭갈비, 삼계탕, 볶음밥 등등 한국 음식은 뭐든지 다 좋아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 인천 생활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라며, 그렇게 재치 있게 빛나던 링 양의 눈동자가 잠시 안개에 싸이듯 흐려지는 것이다.
가본 곳도 많다. 경주도 춘천도 제주도도 울산도 포항도 다 다녀 보면서 진정 역동적이고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의 모습을 부럽게, 충분히 살폈다며, 문득 진한 애국자 같은 소리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천 6개월이 아주 호사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이렇게 견문을 넓히는 기회였다는 것이며, 그것이 인천시 당국과 시민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는 이유라고.
사진을 찍는 링 양의 표정이 참으로 진지하다. 포즈도 아주 능숙하게 잘 잡는다. 사진 작가는 따라갈 수 없게 자꾸 장미 숲으로 그녀를 인도한다. 서운하지만 이제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봄에 와서 시월에 돌아가는 남국 여인, 위엔 칸 링 양에게는 ‘나비부인’처럼 ‘미스 사이공’처럼 ‘떠나는 향기’만 남은 것이다. 시드는 장미의 향기만 남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가을이 참으로 충만하게 텅 비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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